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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Nov 15. 2023

벽서의 고독


 내 안의 사람은 항상 외출 중이다. 내 안의 사람은 외출에서 돌아온 적이 없다. 그러니까 그는 처음부터 나간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나간 적이 없다는 것은 들어온 적이 없다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닐 것이다. 나는 그와 교제할 수 없다. 나는 그에게 이야기를 요구할 수 없고, 나의 밋밋한 삶의 얘깃거리들도 당연히 그에게 전달될 수 없다. 가끔 그가 울고 있다는 걸 느낄 수는 있지만, 증명 불가능한 매혹적인 심증일 뿐이다. 태어나지 않은 채로 사라진 그의 얼굴은 이십 년 하고도 이 년째 미궁이다.


 나는 소설을 잠시 접기로 한다. 무한한 휴식으로 가지 않기를 바랄 뿐인 마음으로 그간의 인형놀이를 반성한다. 물론 그때는 나도 인형놀이에 심취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정할 수 없는 슬픈 깨달음이다. 내 안에는 사람이 없다. 나는 왼손과 오른손에 사람을 닮은 인형을 끼우고 무성(無聲)의 인형극을 즐겼을 뿐이다. 인형극은 끝이다. 인형극의 무대를 파쇄하기 전에, 나는 바닥을 뒹굴고 있는 인형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어찌나 사람을 닮았는지. 나 한 사람 정도는 충분히 속일 만하다는 생각이 자위가 되지는 않는다. 생명이 없는 것들을 불태운 나는 생명이 있는 것들을 맞이하기 위한 최후의 단장에 접어든다.


 그래봤자 기다리는 일뿐이다. 나는 기다리는 일을 넘어서지 않는다. 있기 전에 없게 된 남자. 나는 그가 남자일 것 같다. 하여튼 그 남자가 존재할 부재의 자리에 웬 작은 식물이 있음을 오늘 나는 발견한 것이다. 그것을 기념하고자 바람 위에 쓴다. 멀리멀리 흘러가라.


 청초한 초록 식물이다. 살면서 이토록 가슴 아픈 초록을 본 일이 없다. 돌아오지 않는 남자가 나에게 어떤 말을 남긴 것 같다. 무성의 전언이지만 바람처럼 품에 스며드는 그 말은, 식물을 잘 보존하라는 것이다. 어려운 말을 손이 쓸 때는 의심해보라는 것. 긍정하고 있는 것을 부정해보라는 것. 반대로 부정해왔던 것은 모험 삼아 긍정해보라는 것. 그렇게 이 식물처럼 진정한 자기의 빛깔을 찾아가라는 것. 나는 툴툴거린다. 아무리 소중히 키우고 날마다 사랑의 손길로 그 잎사귀를 애만져준다 한들, 생명이 있는 것은 시들어버리기 마련인데. 그러면서도 나는 작은 그 식물을 사랑스레 내려다본다.

  

 무대를 철거하고, 인형을 전부 불태웠는데도 닫힌 문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없다. 잠긴 듯 보이지만, 문고리가 고장 난 문이다. 더 이상 잠기지 못하도록 내가 직접 문고리를 고장 낸 것이다. 충동적으로 그런 게 아니다. 미련스레 문 앞을 지키고 앉아 있어볼까 생각도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을 누가 반겨줄까 싶다. 누군가가 천진한 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까지 나는 등을 돌리고 앉아, 무시무시한 일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흰 종이를 더럽힌다든가. 사랑에 대한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매일 한 움큼의 부드러운 적토를 퍼먹는 동물의 이야기를 공상의 벽에 새긴다든가. 그러면서 말이다.


  나는 보다 진실되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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