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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Nov 17. 2023

첫눈은 오려나


 눈이 내린다는 날에 내 눈은 욱신욱신 아프다. 잠을 푹 자지 못한 날에 이렇다. 언제나처럼 아픈 눈알은 왼쪽 눈알이다. 나는 비교적 이른 시간에 눈을 떴지만 두 시간이 넘도록 기상하지 못했다. 무언가에 대한 공포가 몽마처럼 나를 짓눌렀다. 어젯밤 배출되지 못한 가슴의 울음이 단단한 고체가 되어 쇠처럼 무거워졌다. 닻처럼 가라앉은 쇳덩어리 울음 때문에 내 신선감 잃은 육체는 강제로 정박되어 있었다. 소리 없이 끙끙 앓는 사람처럼 내가 묵언의 사투를 벌이는 동안, 바깥세상은 너무도 하이얀 채였다.


 오늘 첫눈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첫눈이 기다려진다. 왜 하필이면 오늘? 이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좀 더 깨끗한 마음으로 첫눈을 맞이하고 싶은데. 나는 첫눈을 기대하며 타자를 두드린다. 아사 직전의 사람처럼 기어가는 글자들. 졸렬한 포복. 아무리 기어가도 포만감을 탐할 수 없다. 흔적 없이 지워지는 문장들. 나는 무엇을 위해 쓰는가? 욱신욱신 아픈 눈을 온전히 뜰 수도 없어 반쯤 감고서, 아니 반만 뜨고서 나는 무엇을 탐하려고 하는가. 성욕을 닮은 개가 짖는다. 순아한 얼굴로 꼬리를 살랑거릴 때도 있는데 오늘은 성이 났는지 광견처럼 짖어댄다. 그러니까 그 개는 나의 개가 아니고, 그 성욕도 나의 성욕이 아니다.


 나는 고작 한심한 성욕 때문에 아픈 눈을 혹사하고 있는 게 아니다. 몸을 진단한다. 지나치게 가벼운 곳이 있는 반면 지나치게 묵직한 곳이 있다. 낯익은 이물감의 시작이다. 전반적으로 불평을 토하고 있는 내 몸은 그래, 활어처럼 생생하다. 오묘한 시간 속에서 오묘한 문장만을 탐하면서 내 몸은 이렇게 생명력을 회복하고, 하루를 살아낼 열정을 끌어모으는 중인 것이다. 내 몸은 더 이상 껍데기나 자루가 아니다. 그 안에는 자아가 있다.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상실한, 무언가에 대한 용기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천천히 기다릴 생각이다. 용기를 잃은 사람은 비참할 수밖에 없으니까.

 

 잔혹(殘酷)에 대한 용기는 끝내 없을지도 모른다. 어젯밤 세상의 잔혹함이 내게 검은 손을 내뻗었고, 나는 경직되어 신음조차 흘릴 수 없었다. 아주 가끔, 불의의 사고처럼 내 눈앞에 세상은 피부가 벗겨진 채 지옥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세상이 지옥 같을 때가 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란 존재는 잔혹함을 발휘하는 인간과 잔혹함에 유린당하는 인간으로 나뉘는데, 중간은 없다. 그토록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밤을 내가 겪어야 했던 이유는 언젠가, 내가 극단적으로 희망적인 밤을 보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균형을 이루고 있으니까. 나는 그런 말을 어디선가 주워들었다.


 첫눈을 오늘 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창 닫힌 건물에서 창 닫힌 건물로 자객처럼 옮겨다니는 길 위에서 눈을 맞지 않는 이상은. 검은 커튼이 창문을 꼭꼭 가리고 있다. 장소가 바뀌어도 기다림은 변하지 않는다. 언제쯤 올까? 천사처럼 내려올 눈. 아름다울 것이다. 사람의 땅에 뿌리박힌 죄들을 도려낼 수 있는, 그런 날카로운 도구는 천사의 것이 아니다. 적어도 첫눈을 관장하는 천사의 것은 아니다. 그 천사의 눈은 그저 덮어주겠지. 아픈 비밀을 감추듯이. 자꾸 반성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나는 은근히 탐욕한다.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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