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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Nov 11. 2023

어떤 아름다움


 어제도 오늘도 나는 세상에 출석한 것 같다. 아마. 요즘 들어서 세상에 출석 도장을 찍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 긍정적 현상이다. 세상의 품은 춥다. 겨울이라 그런 것이다. 누구는 아직도 가을의 구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나 한 사람의 겨울은 이미 여기에 있다. 모르는 방향은 여전히 모르고, 아는 방향엔 드디어 학을 떼기 시작이다. 세상의 지도에서 가장 밋밋한 부분을 담당하는 동네에서 살고 있다.


 머무는 곳에는 추억이 남기 마련이다. 아무리 짧게 머문 동네라고 해도, 그곳이 아무런 인연이 없는 동네보다는 나의 가슴에 친숙하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모르는 방향으로 향할 수도 있는 몸이 기어코 아는 방향을 택해서 걷기 시작한다. 나는 순순히 따라가 준다. 너무 친숙한 거리를 걷는 일의 장점은, 장점이란 게 만약 정말로 있다면 아무래도 긴장을 늦출 수 있다는 점 아닐까.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는 거리에서는 아무런 접촉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늘이 갑자기 붉어지지 않고, 무뚝뚝한 행인의 눈동자에서 나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애틋한 빛을 발견할 수도 없다.

   

 다 그러고 사는 거지. 낯설지 않은 곳의 다른 말은, 기대할 것이 동나버린 곳이다. 변화가 없는 이 거리를 나는 체념했다. 하지만 오직 체념만이 내가 거리를 품을 수 있게 해준다. 올해 초여름 떠났던 거리를 다시 걸어, 몇 달 전부터 출근 도장을 찍는 카페에 입장한다. 사람들이 있지만 그래도 한산한 편이다. 나는 사람이 북적거리는 공간에서는 (어째선지) 쉽게 안정을 잃기 때문에 이 정도의 밀집도가 마음이 편하다. 직원의 붉은색 유니폼은 여전하다. 새로 입장한 사람에겐 영 무관심하고 자기들끼리의 가벼운 담소에 푹 빠진 사람들도 여전하고. 반가움을 느껴야 할까?


 저건 무슨 광경인 걸까. 입장하자마자 눈길을 끄는 두 사람의 광경에 나는 순간 자제심을 잃고 그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실수를 저지를 뻔한다. 편안한 등받이 의자가 있는 구석 자리에 앉은 한 덩어리의 연인이다. 내 나이 또래인 것 같다. 내 나이 또래의 남자와 내 나이 또래의 여자가 서로 자석처럼 붙어있는 모습은 심심치 않게 목격되지만, 오늘 내가 본 것은 이상하다. 남자 쪽은 여자의 품에 안겨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고, 여자 쪽은 그런 남자를 자식처럼 끌어안고 있다. 정말 자기가 낳은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자식이 울고 있다는 게 막연히 너무도 미안한 것처럼.

  

 내가 잘못 본 건가? 너무 오래 의식하고 있으면 그쪽에서 나를 의식할 것 같아,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으면서 그쪽을 훔쳐본다. 도대체 무슨 슬픈 일이 있길래. 얼마나 지독한 슬픔이 마음을 들볶아야 남의 품에 안겨서 흐느낄 수 있는 것일까. 정말 이상하다.


 왜인지 그 연인의 모습은 낯설지가 않다. 아니 분명히 낯선데, 친숙한 거리를 산책할 때처럼 안정적인 기분이 느껴지는 것이다. 나의 연애가 섣부르게 내 앞에 예고된 것처럼. 그리고 나는 그것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물론 사랑하는 남자가, 사랑하는 소년이, 사랑하는 선생님이, 사랑하는 친구가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으면, 나는 얼마 안 되는 나의 품을 기꺼이 내어줄 생각이다. 하지만 슬픔의 알러지가 있는 내가 재채기를 하지는 않을까. 나의 재채기가 모든 것을 망쳐버리는 건 아닐까.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내부에서 막 생겨난 따끈한 어두운 영상을 바라보고 있다.


 확실히 지금에서 멀리 있는 어느 날인 건지, 조명이 전체적으로 칙칙하고 어둡다. 요즘 나의 생활의 색감과는 사뭇 다른 영상의 음울한 색감. 거기 내가 있다. 나는 얼굴이 창백한 남자와 카페의 구석진 자리를 겸손히 차지하고서는 건전하고 착실한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불쾌감을 전파하고 있다. 나는 그의 품에 느긋하게 기대어 소리 없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다. 나의 화장기 없는 얼굴은 건강하게 보인다. 빈곤한 인상의 남자는 품이 어지간히 딱딱하다. 그는 느긋하게 내게 몸을 맡길 수 있는 품을 내어준 채 히죽거리기도 하고, 테이블 위에서 찢어진 종잇조각을 가지고 놀기도 한다. 투명하기만 한 그 눈물에서 슬픔이 배제되었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는 담배를 피울 것이다.


 평온하지만 기묘한 기분이 가슴에 퍼지면서 감상도 끝이 난다. 하얀 침묵 위에 한땀 한땀 수놓은 검은 글자들을 가만히 마주하는 동안 가슴속에 드리운 최후의 먹구름 한 조각까지도 몰려가고 조용해진다.


 어제, 아주 익숙한 동네를 걷는 내 모습이 쓸쓸해 보였을 것이다. 정말로 나는 쓸쓸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번화가로 향했다. 나는 옷과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로 들어가 반지를 끼어보고 털실로 짠 모자를 써보았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마음 편히 웃을 수는 없었지만, 이상한 짜릿함을 느꼈다. 자유로웠다. 가게를 나와 다시 걸었다. 해가 구경거리를 얻지 못한 채 퇴근하고 있었다. 해는 매일 출근이다. 해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세상이 실망스러워도 매일 똑같은 정열로 세상을 밝혀주어야 하니까. 나는 해처럼은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문을 걸어 잠그고 싶지는 않아서, 정말 그런 시기는 끝이 난 것 같아서 손이 얼 것 같은 추위 속을 하염없이 걸었다.

 

 아는 풍경이 아는 풍경으로 이동할 뿐인 세상에 나는 금방 지루함을 느꼈다. 직선으로 향하는 나의 무뚝뚝한 발걸음이 동네의 심장을 가로질렀다. 그 낡은 심장 속에는 내가 성년기로 챙겨가지 않은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아직도 천진하게 방황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주워 담을 생각에 추호도 유혹받지 않고 묵묵히 지나쳐 갔다. 나를 감동하게 하는 기억이었다면 진작에 주워 갔을 것이다.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 나에게 사랑받지 않는 기억의 파편들이 이런 나도 주인이랍시고 하나둘 일어나 나 보란 듯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나쳤다. 지루하고, 밋밋하고 싱거운 길이 꼭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초등학교 맞은편에서 혼자 불타오르는 붉은 단풍나무는 어딘가 지독한 인상을 풍겼다. 지독한 것에 감동하는 편인 나는 그 나무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 단풍나무의 심장은 항상 지칠 줄도 모르고 불타오르다가 딱 하룻밤 사이에 폐허가 될 것 같았다. 화려한 폐목(廢木)이 될 그 한 그루 나무의 전신을 나는 사진으로 기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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