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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Dec 11. 2023

이런 밤


 허리를 곧게 펴고, 깊이감 있는 표정을 안면 위에 포갠다. 야수의 호흡이 들끓는 두꺼운 시집. 유리컵인 척 속이는 플라스틱 컵과 녹아버린 딸기 스무디. 깊은 새벽의 정신처럼, 부드럽고 흐물거리는 빨대. 카페 밖에는 여전히 차가운 밤비가 쏟아지고,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남성들은 우울해 보인다.


 비가 내리는 밤. 나는 스스로 정신의 낭떠러지에서 걸어 내려온다. 장엄한 절벽이라고 믿어 온 그곳이 그저 야트막한 언덕이라는 것을 알아버렸기에. 애송이. 나는 너무 애송이다. 내 어둡고 매력적인 정신의 풍경은, 반항을 배운 적 없는 애송이의 어설픈 독기에 지나지 않는다. 한 과묵한, 거구의 남성의 우산 위로 하이얀 새똥이 툭—


 떨어지는 장면을 나는 상상한다. 세련된 인상의 담뱃갑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검은 우산을 쓰고 가는 멋진 마초. 절제된 근육의 움직임과 고뇌에 잠긴 눈빛으로 여성의 심장을 때리는 마초. 그는 새의 숙변이 묻은 우산을 쓰고, 삶의 비극적인 비밀에 접근해가는 탐구적인 얼굴을 한 채, 음울한 남자들 틈에 섞여서 집으로 돌아간다. 나 역시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오늘, 나의 궁핍한 두뇌에 무엇을 채워 넣었나. 나의 두뇌는 여전히 가볍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멋있는 수학 공식을 한 개도 외울 수 없고, 다른 나라의 언어에 능한 것도 아니다. 고귀한 타인의 심장이 가진 고통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을 때, 나의 진가를 발휘하기 위해서 어제도 오늘도 고독한 습작을 써 갈기고 있기는 하지만. 지식의 폭식보다도 정신의 풍요를 갈구하는 이런 밤은, 유혹적인 문장을 피하게 된다.


 자아 도취. 같은 못된 말을 내 지난 어설픈 독기의 이마에 새기는 것은 주인으로서 못 할 짓이다. 조금 더 어른이 되어라. 나에게 말한다. 타이르는 듯한, 그러나 나무람 없는 조용한 음성으로. 나무라는 순간, 내 약한 두 귀는 고막의 걸쇠를 꽁꽁 걸어잠그고 외면해버릴 것을 알기에. 어쨌든, 호흡하는 시간이다. 유리컵보다 예쁘지 않은 플라스틱 컵의 밑바닥에서 떨어진 물이 습작 종이 위에 번진다.


 검은색 잉크가 뭉크러진다. 너무 오래 숙성된 열매의 썩은 즙처럼. 절묘한 장면이라는 생각을 거두지 못하면서 내내 번져가는 글씨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것은 두 방울의 진한 눈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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