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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Nov 29. 2023

증기 같은 당신


나의 차림이 위아래 전부 검정인 이유는 마음이 검기 때문이 아니다. 아름다운 먹구름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행여나 나를 목격한 사람들이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피로 젖은 것처럼 붉은 목도리를 두른 것이다. 목도리는 내 심장이다. 목도리 없이는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겨우 추위나 막아주는 목도리가 아니다. 열정을 찾는 사람이라는 표시가 되어준다.



누군가의 입김이 유리벽에 달라붙는다. 현실은 상상과 얼마나 다르단 말인가? 눈발이 소금처럼 휘날리는 거리를 바라보면서 여유를 부릴 생각으로 왔지만, 그건 이루어지기엔 과분한 행복이었나보다. 누군가의 입김이 달라붙은 유리벽 너머의 세상은 너무나 뿌옇다. 안개로 가득 찬 것 같은 세상이 수상해 보이기까지 한다. 안개는 음모일까. 유리벽 안쪽에서 내다보는 바깥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비밀처럼 보인다.


○ 


지치지도 않고 유리벽에 입김을 퍼뜨리는 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나는 그가 울고 있을 것만 같다. 증기처럼 오묘한 남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증기처럼 오묘한 남자와의 연애는 얼마나 끔찍할까.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면 욕실 안에 증기가 차오른다. 그 안에서 가만히 물을 맞고 있으면 닻을 품은 마음도 어느덧 구름 위에서 떠다니는 듯하고, 누군가 내 몸을 양털 이불로 감싸준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목욕을 오래 하게 된다. 나의 뇌가 산소를 잃어가고 있단 것도 모른 채.


○ 


미래의 애인처럼 혹은, 그의 가슴 안의 비밀처럼 보얗기도 한 증기. 나는 결국 기절해버리고 만다. 중심을 잃기 직전 나의 눈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붉은색의 세포 알갱이들이 무수히 분열하면서 증식하는 장면인데, 기묘하기 짝이 없다. 쓰러지기 직전 나에게 허락된 마지막 장면이 고작 세포 분열이라니, 나는 조금 억울한 기분이 된다. 나의 미래를 한 장면이라도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 내 삶의 방향을 지시해줄 수 있는, 어떤 평범하고도 결정적인 장면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아쉽게 그날을 회상해본다.


○ 


그것은 나의 첫 기절이다. 타인의 개입이 전혀 없는 순수한 나만의 사건.


○ 


믿었던 친구나 애인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당혹스럽고 무서운 기분이다. 기절이란 것은. 나는 한순간 완전히 종료되었다가 기적적으로, 아니 예정된 운명대로 다시 작동되었다. 그저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되찾았을 뿐인 그 사건이 나의 깊은 내면을 뒤흔들어 놓는다. 나는 변한다. 나는 수리된 장난감처럼 새로운 기분이 된다. 우선 멋지게 목도리를 착용하는 방법부터 배우겠다고 다짐한다.


○ 


신고식……. 그것은 무언가에 대한 신고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휘파람을 분다. 신고식은 두 번이 필요 없다. 한 번이면 된다.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흘러가는 초입에서 어떤 큰 존재의 뜻대로 나의 신고식은 준비되었고, 거기에 나는 이끌렸다. 무엇엔가 홀리기라도 한 듯이.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확실히 무언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미래의 연인 그 남자의 희미한 목소리에 나는 증기의 색깔을 입힌다.


○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나는 몇 살쯤 되어 보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 


타오르는 붉은색 목도리를 두르고 현관을 나서자마자 목격해버리고 만다. 하얀 순정의 결정들이 휘날리는 오후 하늘의 광경을. 오후의 하늘은 흐렸다. 입김이 부착된 유리벽처럼. 나는 오븐 속의 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느끼면서도 표정을 가다듬었다. 납작한 플랫슈즈 속의 발을 생각했다. 쉽게 지치고 믿음직하지 못하지만, 나는 두 개의 발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순정이 흩날리는 거리를 묵묵히 걸었다. 혼자서! 세상이 거짓말 같았다. 거짓말 같은 이 세상도, 그리고 행복한 산책자인 나도 사실은 거대하고 탐스러운 스노우볼에 갇힌 신세인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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