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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May 24. 2024

밀담

짧은소설


 ―해가 길어진 어느 여름 저녁의 일 하나.


 나는 페이지를 넘기다 말고 책을 집어 던졌다. 나무랄 데 없는 문장과 매력적인 이야기들이었지만 나에겐 도저히 소화되지 않았다. 나는 한마디로 책을 과식하다가 체한 것이었다.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분노를 잠재우려고 애썼다. 그 분노가, 어디서 온 것인지 나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요즘 인간관계는 대체로 평탄했다. 공부도 잘됐다.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갈 시간이 없다는 것만 빼면 나무랄 데가 없었다. 나는 그 무엇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 무엇도 진심으로 미워하지 않았다. 머리가 많이 길었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깊게 숨을 내쉬었다. 내 손에 집어 던져진 책이 쓸쓸해 보였다. 나는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몸이 무거워서, 책을 주우러 일어날 수 없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창밖에서 느긋하게 저물어가는 하루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노란빛을 띠는 하루의 마지막 햇빛이 가슴에 스며들어 알 수 없는 슬픔을 자아냈다. 사방의 절반 정도는 이미 푸른 저녁 빛에 잠겼고, 나머지 절반은 아직 끝나지 못한 낮이었다. 날이 천천히 저물고 있었다. 그 느긋함에서 오는 잔잔한 슬픔이, 삶에 대한 잔잔한 애정과 뒤섞여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나는 착한 사람의 열중하는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착한 사람의 물감 묻은 얼굴과 날카롭고 예리한 눈매, 그 섬세한 시선 끝에 펼쳐지는 그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자아의 세계를 멋대로 상상해보았다. 착한 사람도 나쁜 마음을 먹을까? 그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있는 욕망을 샅샅이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죽여버리고 싶어. 취했을 때, 착한 사람은 술집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고 중얼거렸다. 전혀 위협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래, 내가 죽여줄게. 근데 누굴 죽여버리고 싶은데? 하니 착한 사람은 여전히 얼굴을 처박은 채 글쎄다― 하고 한없이 가볍고 능글맞게 대꾸했다. 설마 나니, 하고 천연덕스럽게 받아칠까 했으나, 장난으로라도 그런 농담은 하기 싫어서 그냥 넘겼다.


 나는 또 언젠가, 착한 사람의 서랍 속 노트에서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여름 태양 아래 멀뚱히 서 있으면 어지럽다. 혼자 있는 건 무섭다.


 나는 그 문장을 읽은 순간 절절한 애틋함을 느꼈다. 그것은 뭐랄까, 모진 풍파를 겪지 않은 사람에게 부여되는 애정이면서, 동시에 나를 나이게 하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설명할 수는 있지만, 설명되는 순간 퇴색하는 것. 나는 팔짱을 낀 팔을 풀고 잠시 무엇엔가 홀린 듯한 얼굴로 멍하니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착한 사람의 집으로 향하는 길 위를 걷고 있었다. 잎사귀는 복숭아색, 하늘은 연보라색. 땅은, 내가 걷고 있는 길은 착한 그 사람의 눈동자처럼 따뜻한 갈색. 이처럼 제멋대로라 묘사는 안 될 것 같았다.


 왔니?


 착한 목소리가 말했다. 따뜻한 갈색 눈동자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몹시 바쁜 듯했다. 역시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찬란한 자아의 세계, 라는 표현을 주문처럼 되뇌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아름답고 찬란한 세계가 아니었다. 제멋대로의, 중구난방의 알 수 없는 상징들로 가득한 어둡고 붉고 끔찍한 그림이었다. 놀라지 마, 내가 좋은 사람이란 것도 의심하지 마, 슬프고 화가 나는 일이 있어서, 그림으로 풀고 있을 뿐이야,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고 줄줄이 읊어지는 변명이 다소 구차하다고 느꼈다. 착한 사람의 착하지 않은 그림 또한 충분히. 충분히…….


 따뜻한 갈색 눈동자가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착한 사람은 착하지 않은 미소를 머금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말했다. 외로우면 여기 있고, 외롭지 않아도 여기 있어. 함부로 들어왔으니 너의 시간을 좀 가져야겠어. 책은 다 읽었니?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 수 없는 분노를 다스리는 데에, 능숙하게 다듬어진 문장과 매력적인 이야기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고 말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완벽한 문장과 완벽한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에 묘하게 내면이 뒤틀렸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정말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착한 사람은 내가 바보라고 했다. 나도 동의했다. 붓을 쥔 손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냐, 생각이 바뀌었어.


 나는 바보가 아니야.


 내가 말했다. 내가 나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아는데. 나는 실없이 웃었다. 말해봐,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고 말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은 말할 수 없어. 말할 기분이 아니라서. 나는 비겁하게 나가기로 했다. 날은 천천히 저물고 있었다. 나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시간이, 행복한 예술가의 주머니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멀뚱히 바라보면서 나는 좋아하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평이하긴 했지만, 나를 정의하는 문장 가운데 하나로 쓸 만했다. 그러나 그 당당한 부탁, 아니 요구는 어쩌면 여기에 남고 싶은 나의 마음을 읽은 그 사람의 착한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해가 길어진 어느 여름 저녁의 일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그 사람의 다리에 머리를 기댄 채, 멍하니 지루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자극 없는 도피의 고요함은 나를 조금씩 현실을 향해서 떠밀고 있었다. 좋아한다. 내가 말했다. 왜? 잠시 뒤 대답이 왔다. 행복을 입으로 찾지 않는 사람이니까. 역시 생각나는 대로 뱉었다. 그림은 좀처럼 완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일까지 읽어야 하는 책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내, 될 대로 되라지 싶어져서 홀가분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엉망진창인 압도적인 사랑스러운 것을 만들어내. 그러면 내가 뭐든지 해주지.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줄 수도 있고, 비밀 연애편지를 보여줄 수도 있지. 나는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 즐거웠다. 정말 즐거워서 콧노래를 흥얼거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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