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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Jul 04. 2024

이제는 슬픔을 짊어지고 가야 할 때

전부 담은 소설


 친구의 품에 안겨 울어본 적도 없는 이가 애인의 품에 안겨 울 수 있을 것 같으냐.


 라며 한겨울의 술집에서 쓰러지기 직전인 너를 제 품에 끌어안은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친구의 품에 안겨 불행에 떨며 울었다 했다. 네 까짓 게 여자를 사랑할 줄 알아? 네 까짓 게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느냐고. 하며 취기와 애달픔에 느껴 우는, 정말이지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마음씨를 지닌 너를 그 친구는 언제까지나 끌어안고서 그래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하고 위로해주었단다. 제수씨랑 열여덟부터 사랑했다는 네가 내 고통을 십만 분의 일이라도 아느냐고 역정을 부리는 너를 비웃지도 않고 껄껄 웃으며 그 얘기는 왜 꺼내는데, 하는데 그 순간엔 너도 좀 창피했더랬다.


 좀 못난 줄은 알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그 여잘 사랑한다. 네가 뭐래도 나는 결혼하고 만다. 내가 그 여잘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다들 내가 세상에서 일 인분도 제대로 못 하는 병신인 줄로만 알지만 내가 그 여자만큼은 확실하게 사랑한다. 너만은 오해하면 안 된다. 하며 스물일곱 남성의 체면 따위 다 술집 더러운 바닥에 내던지고 서러워 우는 너를 참 포기할 만도 하건만, 너의 대단히 침착한 그 친구는 아이고 아이고 육갑을 떤다, 그래, 결혼해라, 결혼해라, 하며 너의 부족한 용기까지도 북돋아주었다는 것이다. 너는 눈물을 그치고 그 친구의 뜨뜻한 품에서 벗어나 맹추위를 뚫고 질주할 겸허한 준비를 시작했더랬다. 어디 가냐 묻는 친구에게 결혼 승낙을 받고 오겠다며 하루만 살다 죽는다 해도 그 여자 속옷이 널린 집에서 죽을 거라며 거의 적장의 목을 베러 가는 기세로 매서운 눈보라를 뚫고 내달려갔더랬다. 눈은 많이도 내렸더랬다.


 "그러언 날도 있었지."


 하고 뻔뻔하게 회고하는 너의 얼굴을 하루의 피곤에 너덜이 난 몸 아래서 지그시 응시하면서 참 밉다 하였다. 세상 어느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의 이따위 추잡스러운 회고를 듣고 좋아하겠는가. 나는 밉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은 울고 있는 듯 자꾸 너의 머리며 뺨이며 쓰다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사랑했다는 여자랑은 얼마나 행복했냐. 하고 묻자 질문의 의도가 다분히 불순하다며 너털웃음을 선선히 터뜨리더니 다 지나간 일이라는 믿기지도 않는 대답이었다. 나는 아직도 구원되지 않은 저만의 불행과 아직도 해갈되지 않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그득그득 어룽진 너의 만취한 눈동자를 잡아먹을 듯이 들여다보다 이내 내 풀에 지쳐버렸다. 나는 네 위에서 일어났다. 너는 어디 가느냐고 그랬다. 꼭 여남은 살 아이 같다. 마음이 지랄맞아 톨스토이를 읽어야겠다고 그랬다.


 "톨스토이? 톨스토이 좋지."


 하면서도 가지 말라는 듯 소맷부리를 잡아당기는 너로 인해 못 이기듯 다시 자리에 주저앉으며 속으로는 안도의 기쁨을 누렸다. 혼자는 두지 말고 여기서 읽어라 응? 하고 세상 밖을 나다닐 때와는 사뭇 다름이 뭐야 완전히 딴판인 솔직담백함으로 나에게 요구하는데, 그걸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나는 그대로 거기 눌러앉았다. 그 여자와의 결혼 생활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결국 끝장이 났다고 너는 말해주었으나 그 내밀한 사정은 나도 알 수 없었다. 거기까지 욕심나지는 않았다. 나는 너의 서재에서 빼내 온, 너의 손때가 묻은 톨스토이 소설을 대충 넘기며 잠든 너를 바라보았다. 잠든 너의 얼굴에 짓눌린 근심의 무게는 마흔 살의 무게보다 무거운 것 같았다. 그런데 자는 모습은 애욕을 알지 못하는 소년처럼 순수한 것이었다.


 왜 그럴까 너는. 왜 혼자만 불행하려고 할까. 친구 없이는 사랑 없이는 죽을 것처럼 힘들어하면서 왜 아무도 너의 울타리 안으로 들이려고 하지 않는 걸까. 왜 너는 고독해야 하는 걸까.


 운명? 타고난 체질? 요즘도 너처럼 고고하게 불행하려고 자신을 들볶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나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래 솔직히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어리석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것이 내가 너에게 거짓없이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존중이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부정하지는 않는 것. 나는 잠든 너의 설핏 찡그려진 미간을 살살 문지르며 너의 대단히 참다운 친구가 남긴 명언을―친구의 품에 안겨 울어본 적도 없는 이가 애인의 품에 안겨 울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이상야릇한 명언을 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었다. 내가 품에 안고 위로해주지 못한 숱한 친구들의 얼굴이 스쳤다. 왜 외롭고 쓸쓸해서 죽고 싶었을 때 친구에게 한 번만 네 품에 나를 꽉 안아달라 부탁하지 않았나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친구의 품에서 너처럼 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부드럽게 펴진 미간 탓인지 한층 약해 보이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어떤 성스러움을 보았다. 어떤 빛을 보았다. 너는 진실로 여자를 사랑할 줄 아는 남자였다. 아무리 약해 보여도 아무리 일탈의 길을 걸어도 그건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나는 초췌하기만 한 네가 다시 보였다. 네가 두렵기까지 하였다. 도대체 너의 깊이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너는 정말 사랑의 나비를 다 지옥의 땅을 범한 죄로 날개가 부러지고 지상으로 추락한 천사일까. 나는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을 바라보았다. 어떤 애욕보다도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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