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한 시간 동안 심술을 부리던 아기가 지쳐 잠이 들고, 옆자리에 앉은 나는 비로소 평화를 찾는다. 너는 지쳤지? 나는 아직 말짱하단다. 사실 나는 아까부터 좀 두통이다. 뮤지컬 공연을 볼 때부터 미약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짓누르고 있었는데, 우는 아기 덕분에 한쪽 안구에까지 피곤한 통증이 전해져 오려 한다. 그러나 아기를 미워할 수는 없다. 잘 빚어진 성체의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기에게 너그러워야 한다. 차분한 침묵을 배운, 검은 무대 의상이 어울리는 어른들도 예전에는 저 유모차 속의 작은 생명체와 같은 존재였으니까.
자주 심술을 부린다는 건, 감각이 예민하다는 뜻이다. 젊은 엄마가 불러주는 잔잔한 노래에 잠시 수그러지는 것을 보면 음악을 사랑하는 아이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목청이 대단한 것이다. 이 아이가 나중에 커서, 내가 팬으로서 좋아하는 K보다 멋진 배우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K는 나보다 반 삼십 년을 앞서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을 통해 자신의 꿈을 움켜쥐었고, 나도 그 뒤를 이어 노력하고 있으니, 곧 소년이 될 아이야 너도 그처럼 빛나는 무대인이 되어보는 것은 어떠니. 너에게 이미 정이 들어버린 나의 마음을 미처 모르고 너의 부모님께서 미안한 얼굴로 유모차를 끌고 사라지는 상황이 아쉬워서 중얼거린다. 뭐,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면 된다. 수학자가 되고 싶으면 수학자가 되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으면 비행기 조종사가 되면 된다.
그럼 나는 견딜 만해진 두통과 함께 계속 쓴다. 음악의 수학적인 아름다움과 형식미를 중시하는 키 크고 멋진 오스트리아의 궁정 악장과 순수한 악동 같은 자유로운 천재 작곡가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이야기는 푸시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와 영화 <아마데우스>, 이 두 작품과 맥을 같이한다. 내가 관람한 공연이 언급한 두 작품과 차별되는 점은, 그 공연 속에는 궁정 악장의 가장 깊은 이해자이자, 영원히 그로부터 이해받지 못할 불행한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는 궁정 악장에게 “나는 그저 당신을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궁정 악장은 끔찍한 후회와 분노에 휩싸여 그를 죽이려고 한다.
그는 특정한 저주받은 인간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깃들어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고, 부끄러운 영혼의 나약함이다. 자유로운 모차르트의 음악을 동경하고 흠모하는 동시에 질투심에 사로잡힌 궁정 악장에게도, 모차르트와 그의 연인 소프라노의 둘만의 사랑을 노래하는 무대를 위에서 가벼운 미소로 내려다보는 황제에게도, 황제를 실망시켜 한순간에 찬밥 신세가 되어버린 재능 많은 작곡가에게도, 그는 낮은 귓속말로 자신을 속삭인다. 그곳에 앉아있던 관객들도 언젠가 그의 낮은 귓속말을 들은 적이 있고, 그것이 한순간의 또는 한나절의 또는 한세월의 불행의 원인이 된 경험이 있다. 그의 속삭임을 통해 흘러들어온 미온적인 분노의 바람이 주체에게 지시하는 생각은 다음과 같다. “저 사람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어.” 누구든 한 번쯤 그의 이기적인 속삭임에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은밀한 속삭임이 주체의 마음을 흔들 때마다 잔인한 아이처럼 웃는다. 오늘 유독 그의 미소가 잘 보였다. 문득 그의 미소가 악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겉으로는 절도 있고 무게가 있어 보여도, 내면은 폭풍이 끊이지 않고 늘 붉은 화염에 휩싸여 있다. 그의 내면은 그에게 지옥이다. 그는, 궁정 악장이 술과 약에 빠져 죽어가는 천상의 음악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려 하자 그러지 말라면서 몹시 괴로워한다. 아스라한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잡념들로 인해 그다지 몰입하지 못하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는 나의 마음을 살짝 흔들어버릴 정도로, 그는 궁정 악장이 영혼의 라이벌에게 동정을 품는 것을 괴로워한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정신적 지주인 궁정 악장을 위해, 지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천상의 존재를 느리고 정확하게 죽여가고 있었기 때문에, 궁정 악장의 그러한 반응은 뼈 아픈 배반이었던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숨죽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무대가 한창 무르익을 때, 현실은 허구가 되고 무대의 세상이 진짜가 된다. 나는 그런 순간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감정적 거리가 몇십 미터 떨어져 있는 관객의 눈으로 보기엔 이날의 궁정 악장은 사위어가는 천재의 불꽃을 아까워한 것일 뿐, 천재의 죽음 자체를 아파한 것은 아니라고 느꼈다. 그런 것이라면 그는 조금 덜 괴로워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행복한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는 이야기이다. 공연에 대한 자세한 리뷰를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줄거리나 노래 가사, 내가 생각하는 이 이야기의 문제적이고도 매혹적인 논제 같은 것은 적지 않기로 한다. 이야기를 보는 사람마다 감상은 다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매력적인, 매력적이라고 느껴도 되는 어떤 점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평행 우주에서 배우로 살 수 있다면, 궁정 악장의 나긋하고 굳센 아내 역할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해볼 수 있는 역할은 궁정 악장의 아내나 모차르트의 연인인 소프라노나 역할의 이름은 없어도 적절한 존재감이 흘러나오는 앙상블들, 이렇게인데 여기에서 선택하라면 나는 궁정 악장의 아내 역할을 할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다. 인간의 나약한 질투심에 굴복해 철저히 무너진 궁정 악장에게 묘한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일까. 나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나도 질투를 해본 적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인 질투에 잡아먹히는 사람을 이해하는 건 아니다.
나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잘 보는 편이지만, 그리고 좋아하는 편이지만 공연을 보고 나오니 이상하게 기분이 처지고 발걸음이 가볍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예술이 아름다운 여운을 위해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아닐 것이다. 힐링과 행복을 추구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당당하게 인간 내면의 파괴성과 어둠을 보여준 공연이 귀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화기애애했고, 그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내가 본 무대가 허구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다시 현실이 진짜 세상이 되었고, 지나간 무대는 꿈이나 소설 같은 소중한 허구들을 보관하는 기억의 서랍 속에 넣어주었다. 감금과 같은 수납이 아닌, 언제든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는 보관의 형태로 누워 있는 것이다. 나중에 이날의 기억이 불현듯 꺼내지는 날은 나의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억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몇 년 전에 보았던 무대의 기억이 지금도 가끔 튀어나오고는 한다. 유의미한 문화생활의 기억이 많이 저장되어 있으면, 뻔한 소리이긴 하지만 한 사람의 내면이 풍요로워진다.
나는 내가 응원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늘 좀 부끄럽다. 그 대상이 작가라면 좀 나은데, 작가조차 아니라면 뭔가 비밀을 말하는 기분이라 쑥스럽다. 이상한 성격이다. 나는 많은 걸 감추고 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만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 있는 것을 어떡하나. K의 팬으로 지낸 일 이년의 시간 이후로도 가끔 근황을 알아보고, 도대체 이 배역은 어떻게 연기를 하려나 기대되고 궁금하면 시간을 내서 보러 간다. 바쁜 일상을 살다가도 문득 생각이 나는 것이 신기하다. 이번에는 제법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일 년 만에 마침 흥미로운 배역을 연기하고 있는 K를 보러 갔는데, 무대 위에서 그는 검은 표범처럼 사납고 멋졌다. K를 입은 배역의 일방적인 추종은 숙주를 향한 흑사병의 사랑처럼 유독했다. 무독(無毒)한 인간의 드라마에, 이를테면 <노인과 바다> 같은 아름다운 고전적 휴머니즘에 푹 빠졌던 마음이 맹수의 발톱에 낚아채 올려져 뭍에 내동댕이쳐진 듯한 느낌이었다. 이토록 역동적인 삶이라니. 이토록 보고 느낄 것이 많은 삶이라니. 나는 삶의 유한성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옷깃이나 미소가 스치진 못했지만, 자지러지는 투정 소리가 스쳤던 아이야, 너도 어서 삶이 너무나도 보고 느낄 것이 많은 행복한 곳이라는 것을 실감하기를. 너는 그냥 졸렸던 것뿐이겠지. 원래 짜증이 많은 아이는 아니겠지. 나에겐 성숙한 언니 정도로 느껴지는 젊은 엄마가 그토록 차분하고 상냥한 사람이니까, 너는 절대 짜증이 많은 아이는 아닐 거야. 너도 어서 커서 사랑을 해봐. 짝사랑의 대상이 되어보고, 짝사랑의 당사자가 되어봐. 그냥 한 번쯤은 해보란 거야. 나도 짝사랑은 싫어. 내려놓고 마음 한구석에 허허로운 기분을 간직한 채 열심히 살다 보면, 가끔 기적적인 기분 좋은 설렘도 찾아온단다. 이런 말투로 말해도 되겠지? 산다는 건 아주 즐거운 것이더라……. 인간은 아름다운 생물 가운데 가장 지저분하고, 지저분한 생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표현마저 부족한 무엇이더라. 네가 노래하는 배우가 된다면 언젠가 K와 한 무대에 설 것이고, 네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된다면 언젠가 나와 찻잔을 기울이면서 문학을 하는 마음을 조금 나누다가 어색하지 않은 침묵을 꽃피우겠지.
흘러나오는 대로 말하는 것일 뿐, 네가 배우가 되길 바란다거나 먼 훗날의 인연을 기다린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시는 떠올리지도 못할 것이다.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겠지. 수학자가 되기 싫으면 수학자를 하지 않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 싫으면 비행기 조종사를 하지 않겠지. 되고 싶은 것이 되는 것만이 행복일까, 되기 싫은 것이 되지 않는 것도 행복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