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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Aug 09. 2024

새벽을 틈탄 말들

독백


 아무것도 쓸 수 없다. 밤은 깊어가는데, 나는 하얀 백지 앞에서 멀뚱히 서먹함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여태껏 내가 세상에 내어놓은 글들은 정말 내가 쓴 것이 맞을까. 나는 지금까지 내가 썼던 모든 글에 설명할 수 없는 서먹함을 느낀다. 어떤 날은 짜릿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심장이 두 배로 빠르게 뛰기도 했다. 어떤 날은 슬픔이 흘러나와서 그것을 누르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나도 참 많은 시간을 지나왔다. 나는 새삼스러이 그런 생각이 든다.


 내 안에서 맥동하던 푸르른 불꽃, 즉 감정이 잠잠하게 가라앉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무엇을 써야 할지 헷갈리고 있다. 누군가는 하늘의 푸르름에 대해 써보라고 하겠지. 또 누군가는 시들어가는 꽃에 대해, 가장 오래 사귄 성품이 착한 친구에 대해 써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하겠지. 그리고 누군가는 미래의 남편을 생각해보라고 하겠지. 나는 그러나 그것들에 대해 쓸 수 없다. 나는 고갈되어 가는 것일까. 어떤 면에서는 고갈이라는 표현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점점 사랑이라는 불꽃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으니까. 그러나 나는 사랑의 역동성에서 멀어질수록 안정적인 인간이 되어간다. 나는 타인에 기대어 하루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내가 주인공인 생각과 고민에 빠져서 시간을 보낸다. 꿈에서는 여전히 사람을 만난다.


 꿈에서 만나는 사람은 창백하고 서늘해 보이지만, 따뜻한 심장을 가지고 있다. 따뜻한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따뜻한 피가 차디찬 뼈를 감싸고 있다. 꿈에서 만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고, 나 또한 그 사람을 좋아한다. 꿈 밖에서 나는 그 사람과 비슷한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현실에서도 그가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지는 않다. 몇 년 전에는 다른 사람이 꿈에 나왔다. 몇 년 전에 꿈에 나왔던 사람은 푸른 계열의 옷을 즐겨 입었고, 운전을 잘했다. 싱그러운 여름 햇빛이 비쳐 들어오는 차 안에는 나와 그 사람, 또 그 사람의 좋은 친구 한 명이 타고 있었고 우리는 연둣빛 녹음 속에 버려진 폐교로 즐거운 소풍을 떠나고 있었다. 운전대는 그 사람이 잡고 있었다. 푸른 계열 옷을 입고 있었고, 운전 실력이 좋았다.


 나를 태우고 아름다운 여름 숲속을 잔잔히 내달리던 그는 더 이상 꿈에 나오지 않았다. 그의 친구라는, 매력적인 입술과 먼 곳을 갈망하는 듯한 아스라한 눈빛을 가진 사람도 더 이상 꿈에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과거 속으로 사라졌으며 이제는 특별한 계기가 없이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조금 고독했다. 지금은 고독하기보다는 피곤하다. 약간의 고독을 치유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피곤해서 눈꺼풀이 살짝 무거워질 때까지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이다. 나는 문장에 문장을 잇는 단순하고도 어려운 행위에 집중함으로써 고독을 잊는다. 작은 고독은 그런 쉬운 방법으로도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 내가 다스릴 수 없는 고독은 없다. 문장에 문장을 잇는 행위로 치유하지 못할 아픔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나는 분명히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내가 결국은 쓸 수 있게 될 것임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잠자코 삼 십분이고 한 시간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대단한 사유를 적을 수는 없다. 시를 쓸 수도 없다. 하지만 나를 편안한 잠자리로 인도하는 글 정도는 쓸 수 있다. 그건 근육의 긴장을 모조리 이완하면 자연스럽게 가능해진다. 몸의 근육뿐만 아니라 정신의 근육도 긴장을 풀어야 한다. 나는 조금 성장했다고는 하나 내가 기억하는 부끄러운 나 자신에게서 그다지 많이 벗어나지 않았다. 그때보다 조금 성장했을 뿐인 나에게 큰 걸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편안해진다. 시계는 네 시 반에서 멈추어 있다. 나는 천장을 향해 바르게 눕는다.


 나는 지금 나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없다. 내가 느낄 수는 없어도 심장은 피를 내뿜고 있을 것이고, 그 따뜻한 맛있는 포도주 같은 피는 온몸을 여행하고 있겠지. 잘 시간이다. 더 이상 깨어 있어 봤자 문장다운 문장을 쓰지 못할 것이다. 이 시간에는 매미들도 잠을 자나보다. 낮에는 귀청이 떨어지게 울어대던 매미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하지만 얼마 후면 다시 울기 시작할 것이다. 매미들이 명랑하고도 구슬프게 울기 시작하면 나의 머릿속에도 잡념들이 피어오를 것이고, 그러면 잠을 자기 어려울 것이다. 내일은 더 즐겁게 살아야지. 나는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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