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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Jul 31. 2024

절벽

단문


  너는 절벽 끄트머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붉은빛이 감도는 밤하늘이었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누군가의 숨결처럼 불어와 메마른 나의 뺨을 스쳤다. 나는 무심하지도 못하고 애달프지도 못한 눈빛으로 너의 차분한 시선을 받아쳤다. 나는 더 이상 너의 장미가 아니었고, 너는 더 이상 나의 밤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너를 좋아하지만 이미 다른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 선하고 아픈 사람을 사랑했다. 이제는 나도 선한 것을 사랑하고 싶었다. 신은 가장 가혹한 형태로 가장 고귀한 사랑을 표현하시는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 사람의 마음에 눈물 자국이 가득한 것을 볼 때 나는 밤을 지새우며 수많은 곡을 썼다. 내가 절망에 빠졌을 때 건반을 어루만지고 내리치며 기묘한 삶의 유혹을 연주하던 너의 손가락이 주먹 안으로 말려 들어가 있었다. 주먹을 쥔 손은 잘게 떨리는 듯도 했다.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을 때 어디선가 낮고 부드러운 허밍이 귓구멍으로 흘러들었다. 네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낯선 멜로디를 천천히 속삭이듯이 흥얼거리면, 나는 자주 밤을 잃었다. 나를 잔인하게 흥분시키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나는 수많은 곡을 썼고, 너의 책상 위에 얼기설기 완성된 악보를 슬쩍 올려놓고는 했다. 마음에 드는 것은 네가 직접 절제된 손놀림으로 음표를 희롱하며 연주해주었고, 너의 냉정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악보들은 가차 없이 처형되어 사라졌다. 나는 서글픈 마음을 느끼면서도, 아무 감정도 없는 손길로 나의 악보에 불을 붙이는 너의 모습에서 두 눈을 돌리지 못했다. 풀꽃에 대한 작은 행복을 노래하는 악보도, 한 방울의 감정이 넘쳐서 흘러내리는 악보도 불꽃의 뜨거움을 피할 수 없었다. 아아 사랑한 날들의 서운함이여. 문득, 외로움을 아는 이의 고귀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와 나의 추억처럼 빛바랜 곡조의 흥얼거림이 서서히 멎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밤하늘 아래서 너와 나는 마지막 작별의 포옹을 나누었다. 나는 너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나는 너의 허리춤을 끊어버릴 듯이 두 팔에 힘을 주었고 가슴을 바싹 맞붙였다. 절벽 밑은 까마득한 어둠. 떨어진다면 뼈도 못 추릴 높이였다. 나는 절벽 밑의 어둠을 응시하면서 너의 불규칙한 심장소리를 가슴으로 들었다. 그날 절벽은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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