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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Jul 15. 2024

떨어지는 하루의 문장들


 만남과 약속으로 꽉 찼던, 흔하지 않은 한 주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한 주를 맞았다. 다행히 감기가 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여덟 시나 아홉 시에 일어나려는 처음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열한 시 전에나 일어나면 다행인데, 오늘은 정오가 다 되어서 눈이 떠졌다. 어제 글을 쓴다고 또 아침을 맞은 탓이다. 내가 어제 무엇을 썼는지, 왜 새벽 동안 글을 썼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애매모호한 미열이 감도는 짤막한 분량의 습작 소설은 끝맺어지지 않은 채 기억 속에 남겨졌다.


 오늘도 국립중앙도서관에 갈 의향이 있었는데, 늦은 기상 시간과 이유 없는 귀찮음이 발목을 잡아서 결국 저녁까지 어디도 나가지 않은 채 집에만 있었다. 속이 좋지 않다. 아주 아픈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편안하지도 않은 상태이다. 저녁 식사는 두어 시간 뒤로 미루고 아직은 밝은 일곱 시의 하늘의 푸르름에 기대어 글을 쓰고 있다. 주중인지라 집에는 나 혼자 뿐이다. 혼자 있으니 설거지를 실컷 미룰 수도 있고, 고요 속에서 책장을 넘기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 수도 있다. 오후 네 시쯤 되어 낮잠에서 깼다. 오후 네 시가 되도록 제대로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자기 반성이 양심의 가책으로 이어져 더운 내 방 책상 앞으로 향했다.


 꽤 오래 전부터 사용한, 이제는 완전히 나의 의자 같은 의자에 앉아 잠깐 또 멍한 기분으로 책장에 꽂힌 책들을 바라보다가 결국 집어 든 것은 책상 오른편에 놓여 있는 책이었다. 책의 이름을 적는 것은 쉬우나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서 생략하고 넘어간다. 이 상(李箱)의 여섯 살 터울 여동생인 옥희가 남긴, 이 상의 어린 시절부터 운명하기까지의 생활에 대한 단편적인 회고록인데 유의미한 내용들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양자 생활, 폐결핵, 실연, 가난, 정말 무서운 가난, 외로움, 방랑, 일경에 의한 체포와 한 달 남짓의 심한 취조. 사람의 몸만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영양 실조에 걸릴 것 같은 불행과 파란의 연속이다. 고작 여섯 장 남짓 되는, 회고적 성격의 수필 안에서 살아나는 망자의 모습이 어찌나 다채롭던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읽었다. 한 시간이 훌쩍 갔다.


 문단과 학계에서는 천재, 기인, 괴짜의 이미지로 낙인 찍힌 이 상의 숨겨진 범상한 면모, 가족과 동생들에게 착하고 따뜻하며, 그 앓는 몸으로 어떻게든 돈을 벌어보려고 갖은 애를 쓰는 모습들을 사실적인 증언의 언어로 읽을 수 있어 제법 유의미했다. 세상이 어쩜 한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가혹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자신의 건강한 갱생을 위한 정력적인 노력을 쏟아도 모자랄 판에, 그 반대의 길을 간 시인의 유약함에도 일말의 책임이 있지만, 그건 그 불행을 당해보지 않고는 쉽게 비난할 수 없는 문제이다. 나는 오래 전에 스러진 어느 서글픈 새벽빛 영혼의 충실한 독자로서 어떤 비난도 삼가며 묵묵히 읽어 가기로 한다.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자기 방치와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을 실컷 욕하며 얼근히 취했던 몇몇 문우들의 마음이 어떻게 정말 비난이겠는가. 너무 아파서 욕을 했을 것이다. 상실의 고통은 극복이 어렵다.


 나는 뭔가를 극복하고 말 것도 없이 그냥 읽으면 될 것이다. 그는 나에게 직접적인 상실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끔 새벽에 슬프게 살았다는 시인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때는, 이런 게 상실의 아픔인가 싶은 애상감이 밀려오기는 한다. 그럴 때는 좀 많이 슬프다. 나는 이 상의 인간적이고 순수하고 따스한 면모를 발견하는 것도 즐거움이지만, 갖가지 기행의 기록들을 읽는 것도 흥미롭다. 요양 떠난 온천에서 만나 질곡의 사랑을 나눈 첫 번째 아내 금홍이와 관련된 기행들은 하나같이 발칙하고 성적이고 기묘하다. 부부끼리 경영한 제비 다방의 안쪽 방에서 다른 남자와 관계하는 금홍이를 문구멍으로 구경하며 제 친구들에게도 보라고 권했다는 일화나 꼽추 화가(아마 구본웅일 것이다)를 구경꾼으로 앉혀두고, 제가 나서 술집 어린 아가씨들과 흘레하는 모습을 구경하게 했다는 일화나. 만일 문우 소운의 회고가 사실이라면, 구경하는 것만이 아니라 구경당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는 그의 내면에서 나는 은근한 나르시시즘 성향을 감지한다.


 좋아하는 사람도 곤란케 하는 영혼. 이라는 말을 떠올려놓고 웃고 싶기도 하다. 사실 이미 웃었다. 그 어떤 신화적인 존재도 이렇게 많은 경조부박—, 까지 썼다가 그것은 이 상이 언젠가 여자들을 비난하기 위해 골라 쓴 힘없는 어휘이므로 남자인 그에겐 경솔한(?) 정도의 신사적인 표현을 써서 다시, 그 어떤 신화적인 존재도 자신의 경솔한 사생활을 이토록 많이 들키진 못했을 것이다. 본인은 참 담담하게 썼고, 주변 사람들도 친구의 영예를 생각하기보다는 한 개의 사실적 증언이라도 더 남겨주려는 충성에서 많은 기억을 기록해주었다. 사람들에게 인간성을 비난받을지라도 그러한 경솔한, 위악적인, 퇴폐적인 기록들은 덧없는 존재가 아니다.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도 저를 미워하지 않을 인간은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현대에 희소한 자신감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겉보기에 나쁜 일화 너머에 보듬어져야 하는 결핍이 있을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아픈 곳을 위안받아야 한다. 보듬어져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손길은 자신의 것일 수도 있고, 타인의 손이어도 행복하다. 자신에 의한 자신을 향한 위로만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언제나 혼자일 필요는 없으리라. 세상에 불행한 사람, 아프게 스러져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나는 잠시 타이핑을 멈추고 시선을 조금 먼 곳에 두었다. 섣부른 슬픔이나 의욕이 아닌 희미한 여운인 것 같았다. 바깥의 하늘은 어두워졌고, 나는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픈 이 느낌이, 살아가기 위한 에너지를 달라고 뱃가죽을 틀어쥐는 생명의 투박한 요구가 묘하게 반갑기도 한 오늘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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