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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Sep 06. 2024

한 조각의 서정

수필


 혼자 있는 밤. 문득 손이 예뻐졌다는 생각을 한다. 자르지 않은 손톱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손톱이 예쁘게 자라는 편이다. 하지만 네일샵을 방문한 적은 없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시절엔 여러 색상의 매니큐어를 사서 혼자 열심히 발라보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런 데 취미가 없다. 건조해 보이는 검지 손톱을 조심히 혀끝으로 핥아본다. 어머, 이런 건 쓰지 말 걸 그랬나.

  

 학교생활, 대체로 평화로움. 요즘 일상, 작은 감사의 연속. 나는 (아마도) 올해에 들어서면서부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나를 대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나의 마음을 일순위로 살피는 연습을 하고 있다. 쓰고 싶은 걸 쓰고, 먹고 싶은 걸 먹고, 하고 싶은 말만 조심히 내어뱉자. 내가 나 자신을 보살피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냥하다는 평가를 자주 듣기 시작했으며, 글을 쓰는 것도 전보다 편안해졌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해야 한다는 미묘한 강박에서 벗어나자 나의 문장이 어디로든 흘러갔다.


 나는 어차피, 아직 한참 멀었으니까, 당분간은 내가 쓰고 싶은 것들만 써 보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글을 쓸 때 나는 외롭지 않다. 내 마음이 쓰고 싶지 않은 글을 붙들고 없는 감정을 쥐어짜낼 때는 글쓰기란 소모적인 활동이었는데, 쓰고 싶은 걸 쓰면서부터는 글쓰기가 온전한 향유의 시간이 되었다. 절제를 배우는 시간이자 내 안의 작은 고독을 치유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올리고 있는, 일반적인 사랑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 수편의 소설 조각들이 나의 궁극적 자아가 지향하는 글쓰기의 결과물은 아니라는 걸, 여기에 분명히 적어두고 싶다. 내가 택하고 있는 이야기의 형식은 차선책일 뿐이며, 나를 오롯이 사로잡는 이야기는 아니란 것이다.


 나는, 이 정도로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내면이 단단해졌음을 느낀다. 나를 오롯이 울리거나 사로잡지는 않는, 말 그대로 하루의 소박한 유희를 위한 문장 놀이에 지나지 않는 글들이 대부분이지만, 그거라도 없으면 나의 하루는 적적해질 것이다. 적적함은 그의 친구인 심심함보다는 어두운 구석이 있어서, 사람을 불필요한 침체에 머무르게 할 수 있다. 나는 침체되어 있고 싶지 않아서, 그날 내가 쓸 수 있는 문장을 눈밭처럼 하얀 백지 위에 신중하게 흩뿌리면서 나의 절제에 뿌듯해하기도 하고, 나의 몰입을 붉은 마음으로 관조하기도 한다. 관조.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무리 격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더라도, 그걸 쓰는 나는 관조적인 태도이다. 여기에 올리는 글들에 한한 이야기다. 여기에 없는, 다른 이야기를 창작할 때는 눈물이 철철 흐를 때도 있다.


 나는 여러모로 브런치란 사이트에 감사하고 있다.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감사의 연속에, 여기에서의 활동으로 느끼는 보람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실 보람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어쨌든 빛을 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내 안의 언어를 일부분 구제해서 문장을 만들어볼 기회를 준다는 점, 거기에 그치지 않고 얼기설기 완성된 글들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이 고맙다. 나는 브런치 활동을 하면서 나의 언어와 조금씩 가까워졌고, 이젠 화장기 없는 맨얼굴의 언어와도 어색함 없이 교유할 수 있다. 나는 언어의 살결을 어루만지고, 그런 다정한 행위의 감각은 곧 나의 마음을 스스로 보살펴주는 감각과 다르지 않다. 나는 부드러운 언어만을 구사하지 않는다. 나는 구속되지 않는 언어를 구사할 뿐이다. 스스로를 돕는 언어를 나도 돕는다.


 혼자 있는 시간의 쓸쓸하지 않음을 말하려고 했는데, 어째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 해버리고 말았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했으니, 오늘 있었던 작은 일을 기록하는 걸로 마무리를 단장해볼까. 나는 내가 뭐하면서, 누구와 이야기하면서, 어디를 다니면서 살고 있는지 일일이 보고하는 데 일말의 취미도 없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정체가 모호하다. 한 겹의 얇고 보드라운 베일이 나와 독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나는 그 베일을 원한 적 없으나, 가려짐 뒤에 숨는 게 싫지 않다. 나는 얼굴 없는 작가이고 싶다. 아무튼 딴얘기가 길어졌고, 오늘의 이야기를 하자면, 오늘은 참 좋은 하루였다. 전부를 말할 수는 없고, 내가 기록하고 싶은 부분만을 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보슬비가 내리는 학교를 바라보면서 돌계단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릴 때 읽은 전래동화 이야기도 하였고, 말의 힘과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도 하였고, 여러 재밌는 이야기를 편안한 분위기에서 나누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보슬비가 보슬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흐린 구름이 끼어 있었지만, 언니와 돌계단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니 그저 청춘의 한 페이지 같았다. 참, 나도 선호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그때의 느낌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나는 언니를 다음 수업이 있는 장소까지 데려다주었고, 이동하는 동안 나보다 키가 큰 언니는 나의 땡땡이무늬 우산을 들어주었다. 누군가와 우산을 나눠 쓰고 발걸음 속도를 맞추면서 걷는 일은, 내가 나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내일 아침은 분명히 피곤할 것이다. 1교시에 고전문학 수업이 있어서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이미 바람직한 취침 시간은 한참 지나고 말았다. 그래도 지금 잠자리에 들면 4시간은 얼추 잘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을 고민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내가 오늘 도서관에서 읽은, 한 일본 작가의 전집 속의 소설에 나오는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제목으로 쓰려 한다. 한아름의 서정도 아닌, 한 조각의 서정이란 표현이 마음에 든다. 한 조각의 서정이 실체성을 가지면 글이 나온다. 나는 늘 그런 식으로 쓰고 있다. 이제 놓아줄 때다. 조각의 서정이 깃든 밤노래를 들으면서, 조각의 서정이 깃든 베개에 머리를 대고 잠시만 헤매다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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