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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Nov 12. 2024

빚이라는 말을 견디는 것

단편소설


  점심으로 먹은 빵에서는 쓴 맛이 났다. 저녁으로 먹은 매운 생선국에서는 불행한 맛이 났다. 팔팔 우렸다고 생각했는데, 생선의 불행이 증발될 때까지 충분히 우렸다고 생각했는데, 너의 생각이 틀렸음을 너는 인정해야 했다. 생선의 칼칼한 불행이 기도로 잘못 넘어갔을 때 너는 괴로운 기침을 토했다. 너는 한참 손등으로 입을 막고 쿨럭거렸다. 기침이 잦아든 뒤에도 목은 칼칼했다. 생선의 복수. 너는 그렇게 생각했다. 국을 끓일 때, 생선 머리를 버리지 않고 넣은 게 잘못이었다고.


  요즘은 그런 날들의 반복이었다. 너는 꾸역꾸역 먹으려고 하지만, 음식이 너에게 삼켜지기를 거부하는. 네가 먹으려는 음식은 술을 제외하고는 너의 영양소가 되기를 거부했다. 너는 무심한 태도 속에서 끊임없이 음식에게 너의 영양소가 되어달라, 너의 일부가 되어달라 구애했지만 너의 진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네가 음식을 섭취하려는, 평범한 남들처럼 식사를 통해 영양소를 축적하려는 의지를 내비칠수록 크고 작은 처벌들이 따랐다. 찬장 속에서 발견한 빵은 어릴 적 늦게 귀가한 아버지의 눈빛처럼 썼고, 옆집 사람에게서 배운 레시피를 흉내낸 생선국은 증오의 맛을 냈다. 무심코 집어든 바나나, 껍질을 벗기니 속이 문드러져 있었다. 겨울을 반기기 위해 팥죽을 끓였는데 한 입을 떠 먹는 순간 입 안에서 팥알들이 황홀한 죽음, 황홀한 죽음 하고 어지러이 아우성쳤다. 너는 이게 다 뭔가 싶어 웃음이 샜다. 식사는 지옥이 되었고 너의 몸은 점점 맑아졌다.


  야위는 대신 맑아져 가는 몸. 너는 어쩌면 이승엔 어울리지 않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너에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만 같은데, 그런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이 너는 한편으로는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은은한 고적 속에 유폐되는 것 같았다. 너는 늘 혼곤하였다. 충실한 자세와 절제된 몸짓으로 낮의 의무를 수행하고 초저녁이 되면, 너의 긴장을 조이고 있던 나사가 나슨하게 풀렸다. 낮의 자아와 밤의 자아 사이에 끼여 고사리처럼 말라가는 초저녁의 자아. 천천히 저무는 해의 표정은 실수로 밟아 터뜨린 잠자리의 사체를 수습하지 못한 채 부름이 있는 곳으로 성급히 달려가는 아이의 표정을 닮았다고, 오래된 냄새가 나는 애인의 접부채를 말벗 삼아 이야기하는 너의 초저녁. 술. 무해한 것과 유해한 것이 사랑하는 사이처럼 얽힌 내면의 빛깔은 연보라였다. 너의 초저녁은 자주 연보라였다. 이제 너는 더 이상 애인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애인이 몇 년 전 남기고 떠난 여름의 물건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가끔 그것은 적적한 술상대가 돼주었다.


  너는 따듯한 술을 좋아했다. 매끄러운 흰 잔에 따듯한 술을 따라 마시면 어둑한 방 안에서 홀로 조용히 앓고 있는 너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다. 때론 화로가 떠올랐다. 때론 어머니 생각이 났다. 아픈 날에는 어머니가 시장에서 조금 일찍 돌아왔다. 너는 어머니의 손이 너의 이마 위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어머니의 발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면 이마를 비벼 열을 내거나 미온이 남은 물수건을 이마에 얹고 있었다. 어머니의 서늘하고 넓적한 손바닥이 어떤 타박도 없이 너의 이마를 식혀주는 그 짧은 시간을 너는 황홀해 하였다. 너는 자는 척을 하며 눈을 감고 있었고, 때문에 어머니가 어떤 얼굴로 너를 내려다보고 있는지는 볼 수 없었지만 너는 막연히 피곤한 무표정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어린 시절 각인된 단 하나의 아릿한 황홀은 너의 골수에 스며들어 성격에도 영향을 주었다. 앓다가 잠든 애인들의 순진한 이마에 손을 얹고 열을 식혀주는 것, 사랑이란 피폐 속에서 너의 마음이 행하는 작은 선. 애인들은 네가 손을 거둔 후에 슬며시 얹어준 차가운 물수건과 꿈 없는 숙면이 열을 내려준 것이라고 착각했으나 너는 늘 착각을 방치했다.


  너는 초저녁부터 밤까지 이부자리에 누워 머리카락의 이야기, 날개죽지에 난 점의 이야기, 검게 변해가는 손톱의 이야기, 가죽 아래 있는 것들의 이야기 따위에 건성으로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때론 무심히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며 시간을 흘려 보냈다. 당신이 하는 짓거리는 시간을 사형하는 거야. 하고 나직한 경멸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던 누군가, 아마도 애인이라고 불렀던 누군가가 그리운데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너는 흐릿한 검정으로 남은 애인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때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너는 너를 향한 부정과 은은한 멸시가 담긴 애인의 말에, 빙긋이 웃어 보이며 자신은 지금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거라고, 훈풍에 흔들리고 싶다는 머리카락의 이야기, 죽음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점과 손톱의 이야기, 어제도 컴컴하고 오늘도 컴컴하다는 장기들의 슬픈 넋두리를 듣고 있는 거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다 얼굴에 베개를 맞으면 즐거운 기분으로 애인과의 기나긴 밤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너를 경멸할 어떤 애인도 곁에 두지 않았다. 녹작지근한 밤. 어두운 터널 같은 밤. 낮에 먹은 쓴 빵과 저녁에 먹은 매운 생선국이 어째서인지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밤이 좋았다. 모두가 잠이 드는 시간이 되어서야 너의 머릿속은 맑아졌고, 일어날 힘이 생겼다. 옆집 사람에게서 선물로 받은 향수를 뿌리고 밤거리를 쏘다녀본 적도 있었다. 다음날 피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너도 조금씩 나이가 드는 거라고 생각했다. 너는 외출을 포기하고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너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황홀의 아픔과 즐거운 상실감에 대하여, 로드킬 당한 길고양이에 대하여, 생선국 간에 대하여……. 옆집 사람에게, 생선국 끓이는 법을 다시 알려달라고 해야겠다고 너는 생각했다. 생선의 불행을 매운 맛으로 가리려고 한 것이 실수였던 것 같다고, 생선의 불행을 감추지 않는 맑고 투명한 생선국 레시피를 알려주겠냐고. 옆집 사람의 웃음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옆집 사람은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부탁을 하면, 옆집 사람은 분명 며칠 동안 연구하고 연구하여 너에게 알맞은 생선국 레시피를 가져올 것이다. 너는 책상 위에 반듯이 놓인 백지를 과묵히 바라보았다.


  ‘몇 주 동안 육체를 짓누르는 납덩이 같은 피로’


  ‘연애’


  ‘거울을 보지 않은 지 닷새가 지났다 온 얼굴에서 비릿한 풀이 자라는 것 같다 내 얼굴은 숲이 될까 기어이 언젠가는 숲이 되어버릴까 그땐 생선국을 어떻게 먹지?’


  너는 종이 위에 두서없이 적었다. 너는 맛있는 생선국을 먹고 싶었다. 생선의 죽음을 겸허히 마시고 있다는 기분을 들게 하는 맛이 필요했다. 그리고 너는 그런 생선국을 발명할 수 있는 사람은 옆집 사람밖에, 너에게 필요도 없는 항수를 건네며 수줍은 표정을 띄우던 그 사람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건 나약한 정신인가, 자신의 생명을 위한 일은 자신이 해야 하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쉬이 답을 내리지 못했다. 시간이 좀 흐르자 너의 손끝에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고, 그것은 피어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뜻 같았다. 그러나 너의 손끝에 맺힌 봉오리는 끝끝내 피지 못했다. 봉오리는 잠시 핏물 먹은 듯 부풀었다가 아릿한 감각을 남기고 시들었다. 너의 고적한 목숨을 위한 음식의 레시피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정성은, 네가 아닌 그 사람에게 더 있을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을 그대로 누설하고 싶었으나 펜을 쥔 손은 망연히 망설이기만 했다. 손은 맥없이 펜을 떨어뜨렸다. 적막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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