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비슷한
소설에 대한 고민을 소설로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지금 학교 도서관 5층 창가 자리에 앉아서 가을이 물든 학교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못 본 사이 단풍이 많이 졌다. 헐벗은 나무들은 쓸쓸해 보인다. 내년 봄에 푸른 잎사귀가 돋아날 때까지 저 나무들은 헐벗은 채로 기다리겠지. 다시 보니 그다지 쓸쓸해 보이지 않는다. 까치들이 헐벗은 나무 근처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오후의 햇살은 과하다시피 따스하다. 포근하다.
무엇을 말하려고 했더라. 소설에 대한 고민. 소설은 늘 고민이다. 지금 듣고 있는 뮤지컬 노래가 있는데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글자로 만든 성 안에서 그래 외면한 채’라는 가사가 나의 마음을 잘 대변해준다. 나는,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눈으로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 소설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자아몰입적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일단 나 자신(작가 자신)에게 유익한 행위이며 어디서 읽은 표현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그것은 지극히 사적인 치유책이다. 산다는 것과 상처 받는 것을 구분할 수 없는 날 글을 쓰게 된다. 도피에 대한 욕망도 물론 깔려 있겠지만 나는 글 속에서 세상을 다시 살아갈 힘을 모은다.
잘못된 환상일지도 모른다. 나의 자유를 좇는 나의 문장이 독자를 소외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피를 흘리는 말처럼 거침없이 질주하며 나의 자유와 마음을 좇을 때 나는 나조차도 소외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인물은 그래서 남자야 여자야, 이 소설은 그래서 어디까지가 경험이고 어디부터가 상상이야, 하고 깊게 생각하는 독자는 솔직히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괜히 독자를 속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가끔 마음이 편치 않다. 내가 응시하는 상상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 적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아 인물의 이목구비를 흐리고, 주변 배경에 담배 연기를 드리운다. 소설 속에서 ‘나’들은 거울을 보지 않는다. 그곳에는 묘사를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이 있기에. ‘나’들은 상대방의 검고 깊은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할 수 있지만, 그것을 말로 옮기지 않는다.
절필하고 멋진 연애나 할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그렇게 말한다. 나의 절필이 세상을 놀래키는 사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실 ‘멋진’이라는 관형어는 붙은 적 없다. 그냥 연애나 할까? 였다. 사실, 독자를 위해 하고 싶은 말은 없다.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기를 바라지만, 그런 목표를 가진 글쓰기를 할 수는 없다. 나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세상이 얼마큼 나쁜 곳인지, 얼마큼 좋은 곳인지 나는 모른다. 거리를 활보하는 무수한 행인들에게서 동시대 인간으로서의 연대감을 느껴본 적 없고, 길고양이를 진심으로 귀여워해본 일도 없다. 내가 사는 동네는 나에게 무감(無感) 그 자체라서 소설이나 시의 배경으로 등장한 적이 없다. 수필에서조차 내가 사는 동네에 대한 정다운 묘사나 그곳에 깃든 추억담은 찾아볼 수 없다. 추억할 일들은 물론 있다. 나는 초중고를 같은 동네에서 나왔기 때문에 거리는 추억들로 넘친다. 그리운 친구들이 있다.
물론 나쁜 기억도 있다. 후회되는 부끄러운 일도 있다. 롯데리아를 지날 때면, 거기 그 자리에 앉아서 내게 화를 낸 친구의 얼굴이 스친다. 그 모든 기억과 추억들이 시끄럽다. 나는 가끔 지난 나와의 단절을 꿈꾼다. 하지만 내가 지나온 모든 날들은 의식과 무의식 속에 깊이 침투하여 있다. 나는 이미 내가 되어있는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고, 앞으로도 그저 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나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얼마나 행복한가? 죽을 때까지 배신하지 않는 동반자가 있다는 것. ‘너의 글쓰기는, 너 자신을 위한 글쓰기야’ ‘너의 소설은 그림이 그려지질 않아……’ 나도 알고 있다. 그림을 상황을 그리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 그런 디테일에 신경 쓸 수 없는 날에는 내가 취하고 싶은 것만 취한다. 나의 소설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기서 나름의 충만감을 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를 위해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나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내가 주고 싶은 것은, 아니 줄 수 있는 것은 붉은 꽃잎 한 장 뿐이다. 잡히지 않는 분위기 같은 것, 흐린 이목구비를 가진 이의 아스라한 미소, 손바닥 위에 내리는 눈의 차가움, 차의 향기…….
언젠가 나도 제대로 된 줄거리를 갖춘 소설을 쓰는 날이 올 것이다. 요즘 나는, 글쓰기 비중을 조금 줄이고 그 시간에 논문이나 시집(생각해보니 소설은 참 안 읽는다)을 읽으면서 외롭게 공부하고 있다. 자아의 공간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차근차근 유대감을 쌓다 보면 나도 사람 냄새 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런 걸 바라는지 아닌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내가 거칠고 애틋하게, 절실하고 조심스럽게 키워 온 소설 속 인물들은 나의 분열된 자아 따위가 아니며 나는 그들의 독자적인 생명 욕구를 인정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누군가, 그럼 그들의 이름은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잠시 먼 곳을 쳐다보다가 그곳에 그리 써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걔네가 안 알려주는데 제가 어떻게 아나요’ 하고 말하겠지. 좋은 대답은 아니지만, ‘이름은 이미 당신의 마음 속에 있어요’보다는 솔직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아련한 말투로 뭔가 있는 척, 제일 싫다.
소설에 대한 고민인지 하루하루에 대한 고민인지. 내가 관심 있는 작가, 내가 관심 가진 적 있는 뮤지컬과 배우, 내가 사랑하는 친구, 이성과 사랑에 대한 단상들, 각종 일상적인 고민과 에피소드들, 그런 것들 이야기하고 싶을 때 가끔 수필을 쓰겠다. 언젠가부터 수필은 써도 쓴 것 같지가 않다. 솔직하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일기장에도 이 이상으로 털어놓을 수 없으니 나는 최선을 다한 셈이다. 소설 속의 거칠고 어여쁜 뮤즈와의 사랑은 거짓말이다. 사랑은 늘 거짓말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소설 속의 화자들마다 어울리는 뮤즈가 다른 것 같다. 왜 내 소설 속의 화자들은 늘 사랑을 하고 있거나 사랑의 아픔에 구질구질 매달리고 있는 걸까. 그들은 나를 피곤하게 한다. 자꾸 그런 이야기를 써 달라고 하니까(!) 나의 글쓰기를 ‘그들을 위한 글쓰기’ 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그래, 그건 안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하는 나를 위한 글쓰기’ 정도로 변주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평범한 못난 연인의 사랑을 그려도 그 속에는 예술가와 뮤즈의 관계가 깔려 있는 듯한데, 나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뮤즈라는 표현조차 기피하는 나로서는 뮤즈를 내놓으라는 화자들의 뻔뻔하고 의연한 요구가 가끔 어이가 없을 정도이다. 어떤 화자는 나에게 말한다. 지옥을 사랑한 천사를 가지고 싶다고. 천사의 심장을 가졌다는 이유로 아버지 어머니 같은 지옥에서 학대당하고 쫓겨난 부외자의 버석버석한 언어 위에 잼을 발라 먹고 싶다고……. 환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어머니 아버지도 없고, 고향도 없고, 규율과 도덕도 없는 태초의 언어로 사랑을 속삭이게 해달라고. 그러면 눈꽃 흩날리는 소리만 날 텐데? 내가 말해도 상관 없다고 한다.
쓸게 써줄게—하고 나는 담배 성냥을 긋는다. 내가 쓰고 싶은 에세이는 이런 게 아닌데, 무의식은 무섭다. 내가 늘상 나를 검열하고 있다는 것은 아는데 무엇을 참고 있는지, 내가 참는 것을 그만두었을 때 과연 내 손끝에서 무엇이 흐드러지며 피어나올지 알 수가 없다. 한때는 비교적 명확히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아니다. 그러나 나는 비틀거리지 않는다. 혼자 글을 쓰던 시절 나는 한 번도 비틀거리지 않았으니까, 그때는 나의 고독과 슬픔이라는 만만한 재료 없이도 내가 가장 보고 싶은 것을 눈물겹게 그려냈으니까. 그때가 내게는 천국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는 둘이 될 줄 모르는 하나의 시절이었다. 하나이기에, 그토록 자유로웠다. 나는 이제 고독도 배우고 슬픔에 대해서도 조금 알고, 주변 사람들의 힘겨움에 조용한 눈빛의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므로 그때와는 다른 것이다. 폐쇄가 아닌 개방의 시간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집에 가도록 하자. 위에서 수필은 써도 쓴 것 같지가 않다는 다소 자조적인 목소리를 흘렸는데, 그래도 지금은 뭐라도 쓴 것 같은 느낌이 조금은 든다. 소설에 대한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솔직히 나는 내가 소설가에 적합한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다. 고민은 계속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화자들을 손도끼로 죄다 도륙해버리고 새로운 화자의 탄생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지만, 나는 아직 그들의 것이다. 그들의 소유이다. 하나 재밌는(?) 고백을 하자면, 내 안의 화자들은 남학생이나 남자들도 있는데 내가 꺼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는 남성 화자들이 훨씬 더 많았고 여성 화자는 극소수였는데, 지금은 거의 여성 화자의 이야기만 쓰고 있는 듯하다. 나의 여성 화자의 그냥 남성 버전인 것 같으면서도 뭔가 더 날 것의 느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더 솔직했던 것 같다. 그들의 시대는 이제 저물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지옥의 천사를 내놓으라고 속삭인 남자처럼(그는 남자이다) 끈질기게 내게 속삭인다면 언젠가 내가 못 이기고 나를 내어줄지도 모른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월동 준비를 잘 하라고 말하고 싶다.
여성 화자들도 마찬가지다. 월동 준비를 잘 해야 한다. 겨울이 되었으니 헤어짐은 보류이다. 겨울이 지나고 푸른 잎이 돋는 봄이 오면 보내야 할 것들은 보내고, 새로이 들여야 할 것이 있다면 거부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너희 독자적인 생명 욕구를 가진 죄 많은 영혼, 불구의 영혼들도 서로 누가 물에 빠지려거든 데려가서 어묵을 사주면서 뭐가 그리 힘드냐고 물어주었으면 좋겠다. 높은 확률로 질문을 받은 쪽은 그냥 어묵이 먹고 싶어서 뛰어내리려는 척을 한 것일 테지만……. 그러다 사랑이 싹틀 수도 있고. 우정이 싹틀 수도 있고. 내 안의 세상에서 그들이 서로의 영혼을 어설프게 위로하고 망가뜨리기도 하는 동안 나는 자아 바깥의 세상에서 눈 오는 소리를 듣고 싶다. 고이 달팽이관에 담아두었다가 친한 사람에게 행복은 눈 오는 소리에 있더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런 말을 했다고 독자들이 볼 수 있는 일기장에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