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남동생과 난 방학마다 수영장에 다녔다. 그땐 그랬다. 방학이면 너나 할 것 없이 동네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웠다. 수업이 끝나고 10분 정도 주어지는 자유 시간엔 종종 잠수 내기를 했다. 두 손가락으로 코를 틀어막고 락스향 풍기는 물속에 머리를 끝까지 집어넣은 채 숨을 참았다. 새파란 물속 풍경은 바깥과는 사뭇 달랐다. 에메랄드빛 수영장 바닥 위로 어른거리는 물결과 마치 진공병 안에 있는 듯한 공간감, 그리고 뽀그르르 올라오는 기포 소리는 마음을 이상히도 차분하게 만들었다. 그건 시끄러운 고함 소리나 아이들의 발끝에서 사방으로 튀던 물보라와 눈과 코로 정신없이 쏟아지던 물방울 같은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시간이 흐르고 훌쩍 커버린 난 더 이상 수영장엔 가지 않지만, 종종 잠수하듯 하루를 살아낸다는 기분에 빠지곤 한다. 특히나 길고 긴 겨울밤이면 더욱 그렇다. 푸르고 축축한 겨울의 긴긴밤은 물속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그 안에 잠겨 있다 보면 홀로 물속을 떠다니며 헤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상은 저리도 환하고 바깥은 저렇게나 시끌벅적한데 나 혼자만 외롭게 유영하는 것 같았달까. 해가 진 뒤의 춥고 어두운 겨울밤은 쉽게 사람을 무력하고 극단적이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홀로 방 안에 앉아 있을 때 찾아오는 캄캄함과 한기, 세상 고아가 된 듯한 고독단신은 그 무렵 내가 가장 겁내던 것들이었다.
어릴 적보다 몸무게도 늘고, 한숨과 함께 폐활량도 늘어버린 난 꽤 오랜 밤을 잠수하듯 겨울밤을 침잠했다.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침대에 누우면 무거운 감정들에 잠식되곤 했고 한겨울의 어둔 장막이 얼른 걷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숨을 참으며 수면 위로 떠오르기를 기다릴 뿐. 언제부터 난 겨울밤을 지독히도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오롯이 혼자로서 견뎌야 하는 시간은 왜 그리도 낯설고 힘들었을까. 어느 지난한 밤중에 문득 생각했다. 올해도 이렇게 외롭고 헛되게 한 계절을 보낼 순 없다고. 봄이 오기 전 어떻게든 결판을 내야 한다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고독한 겨울밤을 무사히 보내는 방법을. 언제까지고 새파란 고독에 흠뻑 젖어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깊고 고요한 밤에 빚어낸 걸작, <산 속의 겨울밤>
하랄드 솔베르그(Harald Sohlberg, 1869〜1935)의 풍경화엔 언제나 푸른빛이 감돈다. 마치 차갑고 푸르스름한 얼음막을 사이에 두고 그림을 보는 것처럼. 그 빛은 기분 나쁜 쌀쌀함이 아닌, 서늘한 포근함을 안겨주는 푸르름이다. 이른 산책을 위해 문밖을 나서는 순간 코끝에서 느껴지는 새벽 공기의 기분 좋은 서늘함이라던가, 막 해가 진 무렵의 산책길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을 때 폐 속으로 쨍하게 밀려 들어오는 신선하고 차가운 기운 같은 것 말이다. 솔베르그는 바로 그 푸른 공기의 느낌을 풍성히 살려 노르웨이의 춥고도 아름다운 기후를 매력적으로 표현했다.
하랄드 솔베르그 (좌) 여름밤, 1899 / (우) 시골길, 1905
솔베르그는 같은 노르웨이 화가인 뭉크에 비하면 작품 수도 적고 잘 알려지진 않았다. 하지만 모국에선 국민화가로 불릴 만큼 사랑받는다. 북유럽 기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앞서 언급한 ‘서늘하고 포근한 푸르름’을 절묘하게 포착해 낸 특유의 톤앤무드가 아마도 그 이유이지 않을까. 솔베르그는 블루 아워, 즉 동이 트기 직전 또는 해질녘의 찰나를 사랑한 화가였다. 대표작 중 하나인 〈여름밤〉이나 〈시골길〉 역시 그가 사랑한 블루 아워를 배경으로 그려진 작품들이다.
산 뒤로 이제 막 넘어간 해가 마지막 레몬빛을 뿜어내고 그 뒤로 푸른 어스름이 짙게 퍼진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하늘은 대지 위의 모든 것을 낭만적인 블루톤으로 덮는다. 이를 배경으로 발코니에서 와인 한 모금 입에 머금는 여름날의 저녁 풍경과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한적한 시골길을 솔베르그는 고요하고도 서정적으로 그려낸다.
하랄드 솔베르그, 론다네의 겨울밤(산 속의 겨울밤), 1914
그중에서도 그의 작품세계의 정수라 불리는 그림은 단연 《론다네의 겨울밤》 연작이다. 〈산속의 겨울밤〉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리즈는 솔베르그가 노르웨이 론다네 산을 주제로 무려 약 20년간 착수한 작업이다. 20여 개의 작품이 수채화나 유화, 심지어 석판화로도 제작되었고 짧게는 1〜2년, 대형작품의 경우 그리다 중단하기를 반복하여 약 15년의 제작 기간이 걸린 대대적인 프로젝트였다.
그림의 배경은 검푸른 어둠이 내린 겨울밤, 그 아래 수풀 사이로 달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설산이 우뚝 서 있다. 눈 이불을 덮어 마치 빙하처럼 보이는 산은 매끄럽고도 단단하며 사방으로 굽이치는 산맥은 그 웅장한 위용을 드높인다. 오로라가 펼쳐진 듯 청록색으로 물든 하늘엔 샛노란 별 하나, 금성. 그 옆으론 북두칠성도 희미하게 깜빡인다. 소음이라곤 오직 거센 눈보라 소리뿐일 것 같은 고독한 론다네의 전경은 황량하지만 분명 어딘가 눈길을 끄는 구석이 있다. 자꾸만 코끝이 시려와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되는 그림이다.
1899년 30세의 솔베르그는 스키를 타러 론다네 산에 왔다가 그곳의 풍경에 매료되었다. 이후 이곳을 자주 드나들며 화폭에 담던 그는 몇 년 뒤 이곳으로 이사를 와 본격적으로 연작 작업에 착수한다. 어떤 작품엔 여우가 등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작품엔 스키 타는 사람들을 그려 넣기도 했다. 구도나 세부묘사만 살짝 바뀌었을 뿐 솔베르그는 20년간 이 주제를(물론 중간중간 다른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끈질기게 붙잡고 있었다.
하랄드 솔베르그, 론다네의 겨울밤(산 속의 겨울밤), 1901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론다네 산이 잘 보이는 어느 눈밭에서 이젤과 캔버스를 설치하곤 생각에 잠기는 솔베르그를 상상하게 된다. 채색을 위해 푸른색 염료를 묻힌 붓을 들었다 이내 내려놓는 솔베르그. 아니, 아직은 아니다. 해가 넘어가고 난 직후의 푸르름을 담으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이윽고 그가 고대하던 청량한 진청빛이 온 세상을 덮고 그의 손길이 바빠진다. 붓끝에서 그려지는 서늘하고도 환상적인 겨울 풍경. 다음 날도, 그 다음 날 밤에도 반복되는 파랑의 향연.
설산을 마주하며 오롯이 혼자뿐인 순간,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춥고 외로웠을까, 혹은 적막했으려나. 론다네를 화폭에 담던 길고 긴 시간 동안 그는 행복했을까, 고독했을까. 남겨진 기록이 많지 않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언젠가 그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에서 심정을 짐작해 본다. “어머니, 겨울의 산은 인간을 고요하게 만듭니다.” 아마도 그는 겨울 설경이 가져다주는 추위와 적막을 사랑했으리라.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 잠잠한 침잠의 순간이 가져다주는 자유로움과 고독함은 어쩌면 그에겐 창작과 영감의 원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침잠의 순간에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솔베르그의 그림은 고요한 침잠의 순간이 가져다주는 힘에 대해 말해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시간, 혼자만의 공간에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에 집중했다. 외롭다며 감상에 빠져 있거나 자기연민으로 비참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고독을 받아들였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창조성이 빛을 발했다. 몇십 년간 한 가지 주제에 골몰하며 어떻게 하면 그림을 더 발전시킬 수 있을까, 스스로 더욱 연마해 나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 결과 스스로 ‘전 생애의 과제’라 일컫는 작품으로 자신의 예술관의 정점에 올라선 하랄드 솔베르그. 그가 론다네 앞에서 보낸 20년 동안의 겨울밤은 나의 겨울밤과는 확연히 달랐다.
하랄드 솔베르그, 어부의 오두막, 1907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 고독이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폴 틸리히의 이 말은 우리가 외롭다고 느끼는 감정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바로 외로움과 고독함은 별개라는 것, 침잠의 순간을 마냥 괴로워만 할 수도 있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즐기며 활용할 수도 있다는 것.
돌이켜 보면 홀로 지새웠던 겨울밤들은 나라는 인간을 한 단계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 몇 번의 우울한 겨울을 보내고 난 뒤 외로움 속에 잠수해 있기보단 유의미한 활동으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즐거워하는 일들, 이를테면 그림이나 글쓰기와 관련된 작업에 몰두했다. 따뜻한 조명 아래 즐겨 듣는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켜두고 그림을 그리거나 좋아하는 단골 카페 구석에 앉아 좋아하는 책을 잔뜩 쌓아둔 채 부지런히 읽고 썼다. 배우고 싶었던 도슨트 과정을 공부하고 미술심리 수업을 들으러 다니며 분주한 동절기를 보냈다. 차갑고 캄캄한 계절을 수동적으로 견디기만 하던 난 어느덧 고독을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솔베르그의 겨울밤이 그를 예술의 경지로 이끌었듯이, 나의 겨울밤은 고독을 자연스럽게 맞이하고 적절히 채워가도록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누구에게나 겨울밤과 같은 순간은 찾아온다. 그 밤은 매우 춥고 쓸쓸하며 시리도록 혹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고요한 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색깔이 결정되기도 한다. 그저 외로워하며 인생의 봄날이 오기만을 손 놓고 기다릴 수도, 혹은 혼자일 적에만 시도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만끽할 수도 있다. 환경을 바꾸는 건 결국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솔직히 아직도 난 겨울이 다가오는 것이 조금은 두렵다. 홀로 가라앉았던 캄캄한 터널 같은 여러 밤들과 잠수의 기억은 여전히 날 움츠러들게 만든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얻을 수 있었던 값진 경험들을 기억하기에 마냥 막막하지만은 않다. 춥고 새파란 계절이 오면, 이젠 외로움보다는 고독을 반가워하며 스스로를 채워보려 한다. 그렇게, 다가올 내 침잠의 순간을 고대한다.
구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출간 전 연재 두 번째 질문은"고독을 즐기는 나만의 방법이 있나요?"입니다.
여러분께는 고독의 순간, 그러니까 홀로 잠잠히 침잠하는 시간에 무얼 하시나요. 저는 한때 침잠의 순간이 많이 두려웠습니다.하지만 언젠가 하랄드 솔베르그의 그림을 보고, 그리고 그의 생애를 찾아보면서 바뀌게 되었어요. 이 시간을 그저 멜랑콜리한 감상에만 잠겨 보낼 수도 있는 반면, 오히려 고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무언가를 창조해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달까요. 솔베르그가 춥고 긴 겨울밤에 그려냈던 <론다네의 겨울밤>을 감상하며 고요한 침잠의 시기를 잘 보내는 자신만의 방법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책<내 마음을 모르는 나에게 질문하는 미술관>은 다음 주에 서점에 입고될 예정입니다. 자세한 일정과 책 목차 소개는 이번 주 중으로 글로 안내드릴게요. 남은 오늘도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