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제법 익숙한 이름이다. 〈인터스텔라〉, 〈베트맨 비긴즈〉, 〈덩케르크〉를 비롯해 최근작 〈오펜하이머〉까지 그가 감독한 영화는 대중성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양손에 거머쥐며 흥행해 왔다. 감독이자 창작자로서 그의 상상력은 경이롭고, 플롯과 줄거리를 예상치 못하게 풀어나가는 방식은 관객에게 매번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특히나 나는 〈인터스텔라〉와 〈테넷〉을 좋아한다. SF 장르인 두 작품은 난해한 물리법칙으로 버무려져 상당히 불친절하지만, 그렇다고 과학 영화로만 치부하기엔 어딘가 억울한 측면이 있다. 어떤 점에선 굉장히 인간적인 영화이기도 하니까.
위의 두 작품에는 어떤 상황을 헤쳐 나가면서 결국 세상을 구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어찌 보면 영웅에 가까운 이들의 동기는 지구 평화라던가 인류 구원과 같은 거창한 게 아니다. 자신이 지키고 싶은 누군가, 소중히 여기는 한 사람을 위해 행동한다. 즉 이들의 원동력은 사랑, 그것도 ‘국소적 사랑’에 가깝다.
예컨대 영화 〈인터스텔라〉에선 은퇴한 비행기 조종사였던 주인공이 사랑하는 딸을 위해 새로운 행성을 찾아 우주로 떠난다. 점차 폐허가 되어가는 지구에서 딸이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맞이하게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테넷〉에는 미래 세력을 등에 업고 현재의 인류를 말살하려는 악인 사토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물론 사명감으로 작전에 임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의 마음 한편엔 남편의 폭행과 집착으로 고통받는 사토르의 아내를 구하려는 연민도 자리 잡고 있음을 부정할 순 없다.
화려한 액션신이나 극적인 스토리텔링보다 나는 이런 사소한 포인트에서 마음이 흔들린다. 지극히 작은 개인이, 또 다른 작은 개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시도하는 이야기. 작은 동기로 비롯된 움직임이 역경과 고뇌를 거쳐 마침내 큰 것을 이뤄내고,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 결국 비정한 현실을 이기는, 그런 꿈같고 영화 같은 결말. 놀란 감독의 영화가 기존의 액션 히어로 영화나 블록버스터로부터 가지는 차별성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곧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들은 현실에선 발견하거나 듣기 힘들다. 하지만 간혹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어떤 국소적 사랑이 한 남자를 살리고 그를 불멸의 화가로 이끈 위대한 스토리 하나를 알고 있다.
국소적 사랑이 피워낸 예술, 반 고흐의 아몬드 나무
여기 한 사내가 있다. 서른일곱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고독과 외로움으로 몸부림쳤던 남자. 오직 그림으로 자신 안의 강렬한 감정들을 쏟아부었던 화가. 하지만 살아생전 단 1점의 작품밖에 팔지 못한 가난한 무명 예술가. 그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지금에야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예술계의 아이콘이지만 생전에 그의 삶은 어둠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특히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과 같은 대표작들은 죽기 전 마지막 몇 년 사이에 그려졌는데, 이때는 영혼의 단짝이라 믿었던 동료 화가 폴 고갱과의 다툼과 결별, 반복되는 발작과 정신적 고통,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답답함 가운데 물감 살 돈조차 부족해 배를 곯으며 그림을 그리던 시기였다. 그런 순간마다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이는 테오 반 고흐, 그의 동생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 사이프러스 나무와 별이 있는 길, 1890
테오는 빈센트 반 고흐와 네 살 터울인 형제다. 그는 물질적으로, 정서적으로 형을 지원하고 부양했다. 자신도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음에도 매달 형에게 생활비를 보냈다. 반 고흐는 테오에게 받은 돈 대부분을 미술 도구와 모델을 구하는 데 사용했고 남은 돈으로 빵과 커피, 담배를 조금씩 사며 겨우 끼니를 때웠다. 늘 신세를 지는 자신이 초라하고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늦은 나이에 미술을 시작하여 수입이 전무하다시피 한 그로선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테오는 힘든 내색 하나 없이 물심양면으로 형을 보살폈다.
그러던 1890년 1월 어느 날, 테오가 편지를 보내왔다.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반 고흐는 한 대목에서 숨을 멈췄다. “전에 말했듯, 아기 이름은 형의 이름을 따서 지었어. 아기가 언제나 형처럼 끈기와 용기를 가지고 살아갔으면 좋겠어.”
자신은 세상의 인정도 못 받는 가난하고 남루한 예술가일 뿐인데, 동생은 아들의 이름을 빈센트라고 짓다니! 반 고흐의 마음은 뜨거운 감격과 고마움으로 북받쳤다. 그는 떨리는 심정으로 애정을 듬뿍 담아 조카에게 줄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이런 편지를 동봉했다. “내가 가장 끈기 있게 그린, 최고의 그림이야. 붓질도 훨씬 더 큰 믿음을 실어서 차분하게 칠했어. 태어난 조카의 침실 벽에 걸어두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흰 꽃이 핀 큼지막한 아몬드 나무 가지란다.”
바로 〈꽃 피는 아몬드 나무〉라는 작품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 꽃 피는 아몬드 나무, 1890
아몬드 나무는 겨울의 매서운 바람과 추위를 뚫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고 알려져 있다. 생명과 새로운 시작의 상징인 셈이다. 고흐는 이처럼 긍정적인 기운을 가득 담아 그림을 그렸다. 눈이 시릴 만큼 맑고 청명한 에메랄드빛 하늘, 그 푸르름 사이로 눈송이처럼 피어나는 백색의 꽃망울들, 강인한 생명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울창한 나뭇가지. 보기만 해도 청량한 에너지와 새출발의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이 그림을 테오는 아기 방에 걸어두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값을 매길 수조차 없는 애틋한 축하 선물이었다.
반 고흐와 테오의 관계는 단순한 형제지간, 우애로만 설명하기에는 벅찬 부분이 있다. 그들은 평생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확인된 것만 해도 600여 통이 넘는다. 주로 “세상에서 나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 테오에게”로 시작하는 반 고흐의 편지는 자신의 일상, 그림에 대한 신념, 꿈과 고뇌와 열정을 내밀히 털어놓는다. 가끔은 작업하고 있는 그림에 대한 스케치를 정성껏 그려 보내기도 했다. 테오는 언제나 편지에 존중과 격려의 말을 잔뜩 써서 답했다. 형의 예술 세계와 혼란스러운 심정을 이해하며 한편으론 걱정했고 그림들의 가치를 진심으로 알아봐 주었다. 테오는 반 고흐가 속마음을 솔직하게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고, 계속 작품에 매진할 수 있도록 칭찬과 응원을 아끼지 않는 최고의 후원자였다.
그들의 편지를 읽으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테오가 없었다면 반 고흐라는 화가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무너지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한 사람의 끝없는 헌신과 정성은 결국 그를 불멸의 예술가로 이끌었고 위대한 걸작을 창조하게 만들었다. 이제 세상은 한때 붉은 머리의 미치광이라고 불리었던 네덜란드 환쟁이를 천재 화가로 기억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편지는, 반 고흐를 향한 테오의 마음은 한 편의 사랑 시 같고 기적 같다. 누군가를 향한 지극히 국소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이 어떻게 세상을 뒤흔드는가 하는 기적 말이다.
결국 그럼에도, Love Wins All
영화 〈인터스텔라〉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랑은 발명한 것이 아니지만 관찰 가능하고 강력하며,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에요.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죠.” 영화에서 딸을 향한 사랑을 동기로 인류를 구원할 우주 임무를 수행하던 주인공 쿠퍼는 블랙홀에 고립되지만, 쿠퍼의 딸이 어릴 적 아빠로부터 선물 받은 시계를 통해 블랙홀의 방정식을 해결하고 이는 결과적으로 쿠퍼가 다시 지구로 귀환하는 실마리가 된다. 여기서 시계가 의미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 이 역시 사랑이 모든 것의 핵심이라는 걸 말하려는 감독의 메시지다.
빈센트 반 고흐, 꽃이 핀 아몬드 나무 가지, 1888
반 고흐를 향한 동생 테오의 사랑의 편지와 테오를 위해 반 고흐가 그렸던 아몬드 나무 그림. 이는 수십 년 뒤의 우리에게까지 큰 감동과 울림을 준다. 사랑이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건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그러나 누군가는 말한다. 사랑이 별거냐고. 사랑 없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고.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사랑은 필수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은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게 많다. 사랑은 지쳐 쓰러진 한 남자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금 붓을 잡게 할 수 있다. 그가 죽을힘을 다해 캔버스를 마주하고 가장 어두운 순간에 가장 찬란한 작품을 빚어내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사랑은 스스로 숨조차 쉬지 못하는 갓난아기가 어미 품에서 기력을 회복하게 하고, 지쳐버린 누군가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우게 만들며, 스스로 힘없고 보잘것없다 자조하는 이를 순식간에 슈퍼맨으로 변신시킨다. 그러니 사랑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만 사랑할 용기다. 만국 전 세계인도 아닌, 거리를 거니는 불특정 다수도 아닌, 지금 내 곁에 있는 단 한 사람을 사랑할 용기.
물론 사랑에는 품이 든다. 물질과 시간과 에너지가 어느 정도 소진되어야 한다. 힘들고, 귀찮고, 때론 버겁거나 쑥스러운 마음이 앞서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한다. 사랑이 결국 세상을 바꿀 거라는 걸 믿어야 한다. 크고 거창하진 않더라도 친구, 연인, 가족.. 내 주변의 존재들을 아끼고 감싸주겠다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작고 미약한 사랑의 말을 하고 눈빛과 행동으로 표현하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럴 때 꿈같고 영화 같은 이야기와 기적은 현실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이 글을 쓰면서 아이유의 〈Love Wins All〉이라는 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앨범 소개 글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는 지금을 대혐오의 시대라 한다. 분명 사랑이 만연한 때는 아닌 듯하다. (……) 하지만 직접 겪어본 바로 미움은 기세가 좋은 순간에서조차 늘 혼자다. 반면에 도망치고 부서지고 저물어가면서도 사랑은 지독히 함께다. 사랑에게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
사랑의 승률이 얼마가 되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사랑 없이 고독한 승리를 맛보는 것보다 세상에 지더라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저물어가는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운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결국 그럼에도, Love Wins All.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그 말에 베팅을 걸며, 작고 미약한 사랑을 매일 건네고 또 받으며 살아가겠다는 게 지금의 내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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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곳은 아침부터 촉촉한 봄비가내리고 있습니다. 며칠간 건조했던 세상을 단비가 적셔주는 것 같아요. 구독자님들이 계시는 곳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책 <내 마음을 모르는 나에게, 질문하는 미술관>의 출간 전 연재를 몇 회 진행하고자 합니다. 이 책에서는 삶에서 한번쯤 고민하고 생각해보았을 질문 25가지를 그림 및 화가의 이야기와 곁들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삶의 특정 시기마다 마주했을 법한 물음표들이지요. 이번 글에선 "사랑은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등장합니다. 요즘은 '사랑'이란 가치가 미약해진 시대라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합니다. 굉장히 추상적인 단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해서 사랑을 해나가야 하는지, 내 작고 국소적인 사랑이 무얼 이뤄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을 무렵 쓴 글입니다. 여러분께는 '사랑'이 어떤 의미인가요?
출간을 축하해주신 분들, 책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이번 주 중으로 책과 관련한 자세한 소식 더 전해드릴게요. 몇 편 더 올라올 출간 전 연재도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