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명화 글쓰기 클럽을 진행한 적이 있다. 모임은 하나의 그림을 감상하고 그와 관련된 키워드를 정해 글을 써서 나누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비록 소수 인원이었지만 ‘명화’와 ‘글쓰기’라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지만 수요가 빈곤한 두 분야에 관심을 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애정을 가진 모임이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회차가 있다. 그날은 앙리 마티스의 〈이카로스〉를 다루며 ‘추락의 요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주제는 예전에 알고 지내던 한 지인과의 대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말이야. 요즘 추락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 엄밀히 말하자면, 어떻게 해야 진흙탕에 처박히는 추락을 피해 안전한 착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한단 말이지.”
당시의 나는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눈앞의 그녀는,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런 말을 할 상황에 처해 있지 않았다. 40대 중반임에도 세월을 빗겨간 듯한 고운 외모와 우아한 애티튜드에 자상한 남편과 모범적으로 장성한 자녀를 둔 그녀는 분명 안정적인 삶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들을 자주 초대해 티타임을 가졌고 잘 베푸는 성격 덕에 주변의 신망도 두터웠으며 그녀가 바라는 일들은 언제나 순조롭게 이뤄졌다. 누구나 한번쯤은 ‘나도 저렇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할 법한, 소위 말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중년’의 표본 같은 삶이었다. 추락이나 진흙탕과 같은 무거운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앙리 마티스, 검은 배경의 책을 읽고 있는 여인, 1939
시간이 흘러 그녀의 속사정을 알지 못한 채 연락이 끊겼지만 한동안 그녀의 말은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두 단어, 추락과 착지를 구분 짓는 요소는 뭘까. 안전하게 두 발을 땅에 딛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추락 대신 안전한 랜딩을 보장할 수 있을까. 추락하고 싶지 않다며 슬픈 미소를 띠던 모습이 신화 속 이카로스와 겹쳐진 채 잊히지 않았고, 그래서 모임에서 추락과 착지 그리고 이카로스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그림에 대한 첫인상은 대부분 비슷했다. ‘단순하지만 분명하고 아름답다, 야수파의 대가답게 강렬한 원색이 주는 압도감이 있다’ 등 다양한 의견들이 오갔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궁금했던 점은 ‘화가는 왜 이카로스를 이렇게 표현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티스의 이카로스는 신화 속에서 오기와 과욕으로 바다에 추락한 어리석은 청년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림 속 뜨겁게 춤추는 듯한 저 사나이는 어쩐지 힘차게 비상하는 모습에 가깝지 않나! 대화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혼란에 빠졌다. 뭔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한 멤버가 이런 얘기를 했다. 어쩌면 마티스의 이카로스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게 아니겠냐고.
거장이 알려주는 추락의 요령, 마티스의 <이카로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이카로스의 추락, 1636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로스는 뛰어난 건축가이자 발명가인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다.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의 명령으로 미궁, 즉 한번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다는 완벽한 미로를 설계한 이가 바로 다이달로스. 어느 날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 공주와 사랑에 빠진 영웅 테세우스가 미궁에 갇히자 다이달로스는 묘안을 써서 그를 구해주고, 이에 격분한 왕은 다이달로스와 아들 이카로스를 미궁에 가둬버린다. 자기가 만든 미로에 갇혀버린 아이러니 가운데 천재 발명가답게 다이달로스는 또다시 묘책을 낸다. 떨어진 새 깃털과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탈출하기로 한 것. 오랜 준비 끝에 그는 날개 두 쌍을 만들고 아들에게 당부한다.
“명심하거라. 너무 높게도, 낮게도 날아선 안 된다. 너무 높으면 태양열에 밀랍이 녹아버리고 너무 낮게 날면 바다의 수분 때문에 무거워져 떨어지고 말 거야.”
하지만 젊고 패기 넘치는 청년 이카로스의 머릿속은 드높은 하늘을 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서 빨리 날고 싶다. 높이 올라가고 싶다! 그리고 마침내 첫발을 떼고 날갯짓을 하는 순간 탁 트인 하늘과 발밑의 광활한 바다를 마주한 이카로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조금만 더 높이, 더 멀리! “이카로스, 멈춰!” 뒤늦게 아버지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날개의 깃털들은 강렬한 햇빛에 녹아 떨어져 내렸고 다이달로스가 어찌할 새도 없이 이카로스는 그대로 바다에 추락하고 만다.
마르크 샤갈, 이카로스의 추락, 1974-1977
호기심과 욕망에 눈멀어 비극적인 죽음을 자초한 이카로스 이야기는 대중들에겐 교훈을, 예술가들에겐 영감을 주었다. 치기 어린 욕심, 탐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향한 동경, 교만 또는 오만을 상징하는 이 인물을 루벤스, 브뤼헐, 샤갈 등 여러 화가들은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작품에서 이카로스가 부정적인 하강의 이미지로 그려진 반면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는 조금 다른 분위기로 화폭에 옮겼다. 눈이 시릴 만큼 새파랗게 청명한 하늘과 반짝이는 별처럼 흩날리는 황금빛 깃털, 그 사이를 누비며 춤추듯 날아오르는(실제론 날개를 잃고 추락 중인) 붉은 심장의 사나이. 제목 없이는 이카로스 신화를 떠올리기 쉽지 않은 마티스의 <이카로스>에는 하강 대신 생기 넘치는 상승의 기운이 감돈다. 그에게 이카로스는, 이 작품은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앙리 마티스, 이카로스, 1946
앙리 마티스는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미술계에 큰 획을 그은 화가다. 야수파의 창시자로서 강렬한 색채와 대담하고도 활기찬 양식으로 자신만의 개성 넘치는 화풍을 창조해 왔지만 말년에 이르러 마티스는 큰 위기에 봉착한다. 1941년 73세라는 노령의 나이에 십이지장암으로 큰 수술을 받은 뒤 더 이상 이전처럼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게 된 것. 이후로 서는 것조차 어려워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고 조수의 도움 없이는 혼자 붓을 잡는 것조차 힘들게 된다.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그대로 끝맺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붓 대신 가위를 든다. 흰 도화지를 형형색색의 구아슈 물감으로 칠하고 잘 말린 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조각내고 붙인다. 일명 ‘색종이 오리기’라고도 불리는 ‘컷-아웃’ 기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 오려내고 덜어내어 한껏 단순해진 형과 색은 캔버스 위에서 자유롭고 리드미컬한 생동감을 뿜어냈다. 이렇게 컷-아웃으로 제작된 독특한 작품들은 마티스의 또 하나의 시그니처가 되어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추락의 위기에서 자신만의 착지를 이뤄낸 거장의 요령이었다.
추락 아닌 안전한 착지를 위한 비행법
그날 모임에서 우리가 다다른 결론은 이것이었다. 어쩌면 마티스는 그림 속 이카로스에 자기 자신을 투영한 것이 아니겠냐고. 70대라는 고령의 나이, 건강 이상과 수술 후유증,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위기감. 충분히 절망스러운 현실 앞에서 마티스는 추락의 징후를 맛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나의 끝인가, 이젠 내려오는 일만 남은 건가 싶었을 테다.
하지만 그는 이전 방식에 무리하게 집착하거나 현실에 낙담하여 포기하지 않았다. 차근차근 색종이를 자르며 자신만의 익숙한 방식과 화려했던 과거에 대한 미련을 함께 오려냈다. 그러고 난 뒤 남은 조각조각들을 모아 캔버스에 하나둘 붙였다. 또 다른 형태의 도약이었다. 그런 마티스의 모습은 〈이카로스〉에서 태양을 향해 뛰어드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검은 사내의 이미지와 꼭 닮아 있었다. 신화와 달리 마티스의 이카로스는 왠지 그토록 동경하던 태양에 닿은 뒤 안전하게 착지했을 것 같지 않느냐는 얘기로 우리의 대화는 결말을 맺었다.
앙리 마티스, 폴리네시아-하늘, 1946
마티스의 삶을 통해 추락과 착륙이 가진 의미를 고찰해 본다. 추락은 돌연하고 예상치 못한 하강이고, 착륙은 속도와 방향, 착륙 위치를 정할 수 있는 예견된 하강이다. 추락과 착지는 둘 다 아래로 떨어진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같다. 인생에서 누구나 한번쯤은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그렇다면 추락과 착지를 잘 구분해 두는 것, 추락의 전조를 세심히 캐치하여 안전한 착륙으로 자신을 비행해 가는 것이 중요한 셈이다. 마티스가 알려준 요령을 적용해 보자면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상승세가 멈추었을 때 내 삶의 불필요한 부분이나 욕심냈던 이전의 무언가를 컷-아웃, 즉 덜어내기. 그리고 하강에 대비하며 새로운 낙하산, 예컨대 바뀐 흐름에 대비하여 관점과 시야를 전환하고 알맞은 마음가짐을 준비해 두기.
현재는 영원하지 않고 시련은 언젠가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미리 두려움에 떨며 살아갈 필요는 없지만 나만의 추락 요령을 만들어둔다면 정말 곤두박질의 순간이 닥쳤을 때 덜 당혹스럽지 않을까. 조금은 여유롭게 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강 속에서 오히려 전에 없던 삶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티스가 가위로 직조해 낸 이카로스의 모습처럼.
최근 내게 추락과 착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던 그녀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떤 힘든 상황에 처해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고 했다. 심히 마음이 아팠다. 이것이 그녀가 두려워했던 추락의 한 형태인 걸까. 하지만 하강의 순간에 대비해 충분히 고심하고 골몰했던 그녀이기에 잘 착륙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지나친 낙관이나 절망 그 사이를 잘 비행하며 무사히 궤도를 회복해 내길. 그래서 지금의 뒤바뀐 삶의 흐름이 그녀를 새로운 곳으로 안내하고 되레 재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나는 다만 소망한다.
책 <내 마음을 모르는 나에게 질문하는 미술관> 출간 전 연재 세 번째 질문은 "안전한 착지를 위한 삶의 비행법을 아시나요?"입니다. 추락과 착지, 이 두 개의 단어 사이에서 저는 한동안 많이 맴돌았습니다. 두 개를 구분짓는 건 뭘까. 언젠가 인생에 찾아올 추락을 피할 수는 없을까.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해답을 앙리 마티스의 <이카로스>에서 발견했습니다.
언젠가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아이돌 가수 BTS 멤버들이 출연해 이와 비슷한 얘기를 하더라고요. 가요대상을 받고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자 어느날 문득 '아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았구나' 싶었다고 해요. 박수칠 때 떠나야 하지 않을까, 이제 끝이 다가오면 추락하는 일만 남은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면서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잘 내려오자"라는 것. 추락은 두려우나 착륙은 두렵지 않기에, 안전하게 착륙하리라 마음 먹었다고 고백하는 모습에서 '누구나 비슷한 고민을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락과 착륙. 얼핏 보면 비슷해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두 단어. 여러분에겐 어떤 의미인가요. 추락 아닌 착륙을 위한 자신만의 요령을 터득하고 계신가요. 마티스가 '컷-아웃'으로 자신만의 착지를 이뤄낸 것처럼, 조금 덜어내고 삶의 시야를 바꾸어본다면 분명 아름답고 편안한 하강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 주를 마무리하는 금요일입니다! 주말엔 출간 전 서평 이벤트와 일정 안내 소식으로 인사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