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늬밤 May 07. 2020

얼굴 없는 아티스트 '뱅크시'와 쥐 가족 이야기

코로나 재택근무 중 그가 남긴 그림 속 위트와 의미

그때 그 시절, 쥐 가족 이야기


지인의 어릴 적 이야기입니다.

 

때는 꼬꼬마 초등학생 시절 추석 즈음, 학교에서 한가위를 맞아 과일 바구니 만들기를 했답니다. 배, 감, 사과, 알밤까지.. 알록달록 고운 색의 지점토로 곱게 빚은 과일들은 정말이지 먹음직스러워 보였고, 한입 베어 물기 전까지는 '진짜 과일'이라고 해도 믿길 만큼 그럴싸했다지요. 


점토는 무르니까 하룻밤 동안 잘 말려야 한다, 는 선생님 말씀에 책상 위에 고이 올려두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다음 날 학교에 갔는데.. 세상에, 글쎄 제일 공들여 만든 보름달 같은 배 모형이 없어진 게 아니겠어요? 눈물 한 방울 찔끔-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주위를 둘러보니.. 짝꿍은 감을 잃어버렸다고 바닥에 엎드려 찾고 있고, 건너편 친구는 알밤을 도둑맞았다며 선생님께 이미 달려가고 없고.. 도대체 누가 몰래 가져갔을까요? 선생님의 온갖 으름장과 어르고 달래기에도 결국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요.


이 이야기를 왜 하냐구요? 바로 범인과 오늘 소개할 그림 이야기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깜짝 놀랄 범인의 정체는 마지막에!) 궁금증을 뒤로하고 만나볼 오늘의 주인공은 희대의 스트리트 아티스트, 익명의 길거리 화가 뱅크시입니다.





뱅크시(Banksy)는 누구인가?


출처 Banksy 홈페이지(www.banksy.co.uk)


뱅크시(Banksy)를 아시나요? 스트리트 아티스트, 그래피티 예술가, 게릴라성 활동가, 그리고 자칭 '아트 테러리스트'까지.. 그를 상징하는 별명과 키워드는 이렇게나 많지만 그의 실체는 아직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얼굴 없는 화가'라고 불리기도 하죠. 


영국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뱅크시는 길거리, 담벼락, 도시의 숨겨진 곳곳에 홀연히 의미심장한 작품들을 남기고 사라지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요. 비폭력 또는 반폭력 메시지, 전쟁과 가난에 대한 경각심 그리고 기존 예술에 대한 비판의식 자신만의 주관이 뚜렷한 철학스텐실 기법을 활용하여 그래피티(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한 벽화)로 표현하는 예술가입니다.


출처 Banksy 홈페이지(www.banksy.co.uk)


그의 작품들을 한번 살펴보세요. 차가운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도시 방랑자를 데려가는 루돌프, 주택 재개발로 인해 막무가내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할렘가의 사람들, 떠돌이 개에게 먹을 것을 주는 듯 하지만 실은 등 뒤에 또 다른 다리를 자르기 위한 톱을 숨긴 사나이(무엇을 비유하는지 짐작이 가시나요?), 인종차별을 자신만의 아름다운 패턴으로 가려보려는 흑인 소녀를 그려 넣은 벽화까지.. 


그의 작품들에서는 소외받은 존재들에 대한 관심과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 대한 풍자가 뱅크시 특유의 시니컬한 위트와 잘 버무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뱅크시는 왜 여느 화가들처럼 종이나 캔버스가 아닌 길거리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걸까요? 이에 대해 뱅크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술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서는 동네의 좋은 벽만 있으면 된다.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불필요한 입장료를 낼 필요도 없다.

- 뱅크시



기에 그의 그래피티는 공공기물 파손, 즉 불법이라는 이유(지금도 여전히 불법이긴 합니다만)로 강제 철거되거나 훼손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비판하는 작품을 또 남기기도 했었죠.. 누군진 몰라도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에요. 


유명세를 타고 난 지금은 오히려 아주 값비싼 예술작품으로 격상하여 경매에서 아주 높은 가격에 거래되곤 하는데요. 하지만 위의 뱅크시 어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자본주의적 예술의 단면을 거부하는 뱅크시는 기존 예술계에 대한 회심의 일격을 가하는 퍼포먼스를 행하기도 했습니다. 





뱅크시가 재택근무 중 '쥐'를 그린 이유


출처 Banksy 인스타그램

편 뱅크시도 코로나 사태를 빗겨가진 못했나 봅니다. 길거리 아티스트인 그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고 있는지 뱅크시가 최근 인스타그램에 사진 몇 장을 올렸습니다. 어디 보자, 여긴 화장실인가요? 화장실을 놀이터 삼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 걱정 마세요. 진짜 쥐는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 쥐 가족들,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걸까요?


자신의 화장실을 캔버스 삼아 제작한 그의 작품을 한번 살펴보시죠.


출처 Banksy 인스타그램

치약을 밟아 벽에 흩뿌리는 쥐, 꼬리로 전등 줄에 매달려 있는 쥐, 두루마리 휴지를 바닥에 다 풀어버리며 어디론가 급히 향하는 쥐, 그리고.. 변기에 볼일(?)을 보고 있는 쥐까지. 세상에, 진짜 쥐가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지경인데요! 이 외에도 거울 속에 거리 봉쇄 날짜를 립스틱으로 세고 있는 쥐, 샴푸통 같은 걸 넘어뜨리고 있는 쥐 등 다양하고 재미있는 쥐 가족의 모습들이 화면 곳곳에 숨겨져 있으니 자세히 들여다보며 찾아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저는 9마리 다 찾았는데 재미가 쏠쏠하더라구요.



이 사진과 함께 뱅크시는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아내는 내가 재택근무하는 걸 정말 싫어한다
"My wife hates it when I work from home"


네.. 왜인지 알 것 같은 건 저뿐인가요..? 작품만큼이나 뛰어난 그의 재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이전에도 작품에 '쥐'라는 소재를 자주 등장시켰는데요. 그에게 '쥐'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더럽고 불결한 존재가 아닌, 작지만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 즉 일상 속 우리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갑자기 쥐가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뱅크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쥐'의 모습들. 의미를 알고 나니 도시 곳곳에서 능청스럽게 여유를 부리는 쥐의 모습들이 더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출처 Banksy 홈페이지





We just got 'Banksy-ed'
뱅크시 당했다! 자기 파괴 퍼포먼스


대영박물관에 유유자적 자신의 작품을 남기고 간 뱅크시. 사냥한 소를 담아가려고 하는 것일까요? 난데없이 등장한 원시시대의 쇼핑카트입니다.


뱅크시의 특이한 행보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앞서 제가 설명드렸듯이 그는 기존의 사회 통념이나 권위를 비판하고 대항하려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해왔었는데요. 그러한 자신의 예술적 철학을 표현하기 위해 극적인 퍼포먼스를 가끔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2005년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2006년에는 대영 박물관에 몰래 잠입하여 자신의 작품을 마치 원래 그곳에 있었던 양 설치해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그가 제작한 방독면을 쓴 여인을 그린 그림과 쇼핑카트를 밀고 가는 원시인이 새겨진 벽화를 보고도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예술'이라는 고리타분한 권위 아래 '진짜 예술'을 보지 못하는 세태를 비꼬고 싶었던 것일까요? 이 사건은 한동안 예술계에 큰 화두를 던져놓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8년, 뱅크시의 작품이 또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는데요. 바로 이 사건입니다.


(좌) 2002년 벽화로 제작되었던 풍선과 소녀  /  (우) 2018년 소더비 경매에 나온 <풍선과 소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풍선과 소녀>라는 작품입니다. 2002년에 영국 런던 근교에 벽화로 처음 제작되었고 그 후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다양한 모습으로 꾸준히 변주 및 재생산되어 왔는데요. 이 작품이 2018년 소더비 미술 경매에서 104만 파운드(한화 약 15억)로 낙찰되자마자 경매장에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작품 속 그림이 저절로 눈앞에서 파쇄되고 만 것이에요..


https://youtu.be/iiO_1XRnMt4

(경악에 찬 사람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현장!)


이렇게 말이죠..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한 <쓰레기통 안의 사랑>. 낙찰자는 이 작품을 그대로 소장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예술의 세계란..!


이 경악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후 뱅크시는 그의 SNS에 이 퍼포먼스가 자신이 계획한 것임을 밝히며 직접 작품에 파쇄기를 설치하는 모습과 함께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 이 역시 창조적인 욕구이다.
"The urge to destroy is also a creative urge"

by. 피카소, 그리고 그의 말을 인용한 뱅크시


이를 알게 된 경매장 측은 "우리가 뱅크시 당했다(Banksy-ed)"라고 표현하였고 한동안 이 용어가 유행처럼 돌기도 했었습니다. 뱅크시, 그는 왜 자기 작품을 스스로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걸까요?

 

그는 완성된 작품 그 자체보다는 작품을 통해 사회에 던져지는 메시지, 철학의 파워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기존 통념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벽화들, 틀에 박힌 예술세계를 조롱하는 듯한 퍼포먼스, 전쟁과 분쟁으로 어지럽혀진 지역에 역설적으로 건설한 호텔 등 자신의 예술 행위가 사회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기능하는가에 더 주목하고 있죠. 그래서일까요,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작품이 공개되는 족족 이슈가 되며 묵직-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뱅크시입니다.





과일바구니 도난 사건의 범인은..?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과일바구니 도난 사건>이 해결된 건 그 해 마지막 날이었대요. 종업식을 앞두고 사물함 비우기를 하던 중, 한 친구의 '선생님! 사물함 뒤로 색연필 넘어갔어요!' 하는 외마디 외침. 다 함께 사물함을 앞으로 당겨내자, 벽 구석에 웬 조그만 쥐구멍이 있고 그 앞에 쪼롬-이 갖은 과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더래요. 귀퉁이에 한입 야무지게 베어 물은 잇자국과 함께요. 범인이 누구였을지 짐작이 가시나요? 


뱅크시의 작품 속 쥐 가족처럼 과일바구니를 털기 위해 작당모의를 했을 그 익살스러운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는 이야기이지 않나요?



마지막으로, 뱅크시의 작품 제작 과정과 철학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영화 하나 추천해드릴까 합니다. 뱅크시에 대한 영화를 찍으려다가 오히려 뱅크시에 의해 찍혀진(?), 그리고 예술가로서 데뷔까지 하게 된 감독이 만든 블랙 코미디 다큐멘터리, 아트 테러 무비.. 정도로 소개하면 될까요.


'나도 뱅크시-당하고 싶다!' 하시는 분들을 위한 취향저격 영화!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하지만 보고 난 뒤 절대 후회는 없을 이 영화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의 출구 없는 매력에 퐁당- 빠져보시길 바랍니다.



by. 아트소믈리에 지니


이전 15화 피카소, 6.25 전쟁의 참상을 그려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