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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밤 May 18. 2020

너도? 나도! 밤나무에 얽힌 두 남자의 사연

율곡 이이와 클림트가 '너도밤나무'에 신세 진 이야기

너도밤나무에 얽힌 율곡 이이 이야기


너도밤나무 이름의 유래를 아시나요?


직장 동료 중에 '이름'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한 분이 있습니다. 어느 날 잠들기 전 남편분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데 너도밤나무는 왜 이름이 "너도" 밤나무인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고 하는데요. 그냥 밤나무면 밤나무지 무슨 '너도' 밤나무냐며 참 이상도 하다고 운을 띠우자, '그거 율곡 이이랑 관련된 유래인데 몰라?' 하더라는 겁니다. 음? 처음 듣는 얘긴데- 하며 들어보니,


(좌) 율곡 이이(김은호 作)와 (우) 너도밤나무 설화


율곡 이이가 어렸을 때 한 스님이 찾아왔답니다. 관상을 보시더니, 허허.. 이 아이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울 인물인데 사주에 액운이 껴서 돌림병으로 죽게 생겼구나! 하는 게 아니겠어요?


이 말을 들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이 분이 누굽니까, 바로 우리가 아는 그 신사임당 아닙니까. 스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어떻게 하면 아이를 살릴 수 있겠느냐고 애걸복걸 하죠. 그러자 스님이 한 가지 묘책을 알려줍니다. '집 뒷산에 밤나무 1000그루를 심으면 이 우환을 면할 수 있다'고요. 그때부터 율곡 이이의 부모는 매일 같이 산에 밤나무를 심기 시작합니다.


결국 정말 돌림병이 돌아 어린 율곡은 죽기 일보직전이 되고 1000그루 중 모자란 밤나무는 딱 2그루.. 어찌할 바를 몰라 주저앉아버린 신사임당 옆에서 갑자기 웬 목소리가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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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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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밤나무에요..!



..?? 돌아보니 밤나무랑 비슷하게 생긴 나무 하나가 안쓰럽게 쳐다보며 쓱- 나서는 게 아니겠어요? 살았다 싶어 밤나무든 아니든 일단 얼른 옮겨 심는데 아직도 한 그루가 모자란 겁니다. 그때 그 '나도' 밤나무가 옆에 있던 비슷한 나무 하나를 쿡- 찌르면서 하는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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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도' 밤나무잖아!


'나도' 밤나무, '너도' 밤나무.. 요 착한 나무들 같으니라고!

..네


그리하여 밤나무와는 일면식도 없는 이 나무들이 그때부터 '나도밤나무', '너도밤나무'가 되었고, 율곡 이이는 병마를 복하여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 (율곡이라는 호에 왜 '율'자가 들어갔는지는 말 안 해도 아시겠지요)


어떠신가요? 이 이야기를 듣고 둘러앉은 저희들 모두 에이~ 이게 뭐에요! 하며 웃어넘겼는데, 찾아보니 정말 '너도/나도밤나무' 이름에 대한 이 유래가 있더라구요. 물론 야사인지라 조금씩 내용이 다르긴 하더이다만, 어찌 되었든 간에 덕분에 즐겁게 웃으며 '너도밤나무'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너도밤나무 숲과 클림트


이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났던 한 그림이 있는데요. 바로 '황금빛의 화가'로 잘 알려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너도밤나무 숲>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림을 먼저 보실까요.


너도밤나무 숲, 1902

네모난 화폭 안에 길게 하늘로 쭉 뻗은 너도밤나무들, 아래쪽엔 옷을 갈아입었는지 소복이 쌓인 낙엽, 평면인데도 뛰어난 원근감으로 인해 마치 내가 이 숲 가운데 서 있는 것만 같은 공간감.. 왠지 쉬폰 케익같이 폭신한 낙엽을 밟으며 귓가에 스치는 가을바람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그런데 그림을 보자마자, 응? 이게 클림트 그림이라고? 하며 갸웃-하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맞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클림트의 그림과는 사뭇 다르지요.


사실 클림트의 그림으로는 그의 대표작 <키스>와 같이 황금을 콕콕 찍어 그렸나 싶을 정도로 눈이 부신, 찬란한 금빛으로 수 놓여 장식미의 극치를 이루는 작품들이 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이러한 작품 시기를 '황금의 시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황금의 시기의 대표 작품들  (좌) 키스, 1908-1909  /  (우)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907

일전에 어머니와의 유럽여행에서 클림트의 <키스>를 직접 마주했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오스트리아의 벨베데레 궁전에서 마주한 이 그림은 정말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죠. 작품 뒤에 조명을 켜 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유난히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에서 보는 것 이상으로 정말 '황금빛'으로 반짝이던 그의 작품들은 아직까지도 눈앞에 생생하게 아른거립니다.


이쯤 되면 정말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이 그림들과는 달리 '클림트'스럽지 않은 저 그림, <너도밤나무 숲>은 대체 어떤 배경에서 나오게 된 그림인 걸까요?





클림트의 영혼의 고향, 아터 호수


이 그림의 주 무대는 오스트리아 북부의 옛 카머 성이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빈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클림트는 여름만 되면 이곳의 아터 호수(또는 아테제 호수)를 찾아 휴식을 취하곤 했죠. 빙하수가 녹아 에메랄드 빛으로 잔잔히 물든 호수의 물결과 인적이 드문 고즈넉한 산책길은 클림트에게 '힐링' 그 자체였습니다.


(좌) 아터 호숫가 운터아흐의 교회, 1916  /  (우) 아터 호수의 캄머 성, 1909

클림트는 아터 호수에서 머무를 때면 매일 아침 일찍이 호수 주변을 산책하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산책로 부근에 있는 너도밤나무 숲을 그린 풍경화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너도밤나무 숲>인 것이지요.


클림트의 풍경화에 대해 더 얘기해보자면, 그는 살아생전 약 220여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요. 그중 4분의 1이 풍경화(약 50점 정도)라는 것, 그리고 그 풍경화의 대부분이 이 곳 아터 호수 근교를 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좌) 카머 성 공원의 잔잔한 호수, 1899 / (우) 카머 성의 공원 길, 1912

사실 클림트의 후기 작품세계의 한 꼭지를 담당하는 이 풍경화들은 그가 '황금의 시기' 때 그렸던 화려하고 장식적인 작품들에 비해 그다지 주목을 받진 못했습니다.


'빈의 화가'라고 불릴 정도로 평생을 빈(Vienna)에서 살며 활동했던 클림트. 그는 예술의 도시 빈에서 느껴지는 그럴싸한 우아함, 아름다움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면서, 모순적이게도 텅 빈 공허한 이면을 절묘하게 그려내었다고 평가받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그의 내면은 아터 호숫가에서 누렸던 쉼과 평안을 더욱 열망했고, 이를 단조롭지만 평화롭게 화폭에 담아낸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좌) 물 위의 성, 1908-1909 / (우) 아터 호수 옆의 시골집, 1914


이러한 그의 풍경화에서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데요, 한번 알아맞혀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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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1. 모두 정사각형 캔버스에 그려졌다는 것
2.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한번 위의 풍경화들을 살펴보세요. 정말 그렇지요?


때때로 삶에 치여 무작정 쉬고 싶을 때나 숨통이 막히는 것만 같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 자연과 마주하고픈 충동을 느끼게 되죠. 다소 독불장군 같은 구석이 있고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구스타프 클림트.. 어쩌면 그도 그러한 마음 상태는 아니었을까, 그림을 보며 살포시 짐작해보게 됩니다.





클림트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며


어릴 적 아버지께서 명화 그림책 두 권을 제 손에 쥐어주신 이후로 그림과 첫사랑에 빠진 채 살아가고 있어요. 그때 참 좋아했던 화가가 샤갈 그리고 클림트입니다. 물론 미술계의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인 저인지라 그 이후로 수많은 화가와 그림에 퐁당퐁당 빠지긴 했지만, 어디 첫사랑만큼 강렬한 것이 있나요!


대학 시절, 어떤 계기로 인해 클림트의 그림을 멀리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미술 교양 수업에서 간이 경매 프로젝트를 할 때에도, 가지고 있는 돈을 몰빵(?)하여 클림트의 그림을 득의양양하게 낙찰받곤 하던 저였는데 말이죠.


처음 클림트의 <키스>를 봤을 때의 경이로운 황홀감, 터져 나오는 감탄, 무조건적인 사랑! 그리고 그 화려한 모습 이면의 인간적인 단면을 알게 되었을 때의 실망감..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우연히 그의 풍경화를 마주하고선, 다시금 그 어릴 적의 빛바랜 감정을 떠올리게 되었는데요.



저는 이것이 마치 '사람과 사람이 관계 맺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새로운 누군가를 알아갈 때 우리는 우선 감탄하게 됩니다. 이렇게 굉장한 사람을 내가 알게 되다니! 좋은 점만 보이고 겉에 드러나는 근사함에 한없이 매료되죠. 그러다 알면 알수록 서로의 한 겹 한 겹 벗겨진 진짜 모습을 발견하면서 '과연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는 걸까?' 하는 회의감에 휩싸입니다. 거기서 물러나면 그 관계는 더 이상 발전되지 않죠.


하지만 그러한 속 사람까지 인정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그저 화려한 겉포장만 만지작 거리는 피상적인 단계를 넘어, 서로의 가장 인간적이고 본연적인 부분들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그것을 클림트의 그림을 들여다보며 배우게 되었습니다.



너도밤나무 이름의 유래로 시작해 율곡 이이, 클림트,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해서까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데요. 생밤을 씹은 듯 살짝 달콤 쌉싸름한 그림 속 우리네 삶에 대한 단상들, 어떠셨나요? 이제 여러분들의 미처 못다 한 생각의 나래를 클림트의 너도밤나무 숲 속에서 펼쳐보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남은 오늘이 한 편의 예술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칩니다.



글. 아트소믈리에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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