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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밤 Jun 25. 2020

피카소, 6.25 전쟁의 참상을 그려내다

<한국에서의 학살>, 예술이 갖는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그렸다구요?


(좌) 파블로 피카소  /  (우) 아비뇽의 처녀들, 1907

'20세기 미술의 거장', '천재 화가'라고 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화가들이 참 많지요. 모네, 마티스, 세잔, 클림트..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한 희대의 천재 화가를 1명 꼽는다면 단연 사람일 것입니다. 이견이 없어요. 예술계 전반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그야말로 획기적인 혁명을 일으킨, 근현대미술의 한 획을 그었던 화가.. 바로 파블로 피카소입니다. 뭐, 그를 빼놓고는 미술사를 논할 수 없을 만큼 어마 무시한 존재감을 가진 스페인의 국민 화가죠.


아무리 미술의 '미'자도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피카소'라는 이 이름 세 글자 정도는 어디선가 들어보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미술 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그의 그림을 만나보았을 겁니다. 다소 기괴한 형태와 이해하기 힘든 구성으로 우리를 당황스럽게 했던 그 그림들 말입니다.


(좌) 한때 경매 최고가를 갱신했던 그의 작품 <알제의 여인들>  /  (우) 마찬가지로 늘 경매순위 10위 안에 있는 <꿈, 1932>

한번 보면 절대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형과 색을 가진 그의 작품들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논란과 관심을 한꺼번에 받고 있으며, 다소 호불호가 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미술계에서는 '피카소가 그렸다'는 이유 만으로 그의 그림들이 미술 경매시장에서 늘 최고가로 이름을 올리고 있지요. 심지어 그가 사용한 팔레트도 약 8000만 원 상당에 거래된다고 하니 말 그대로 월드스타, 슈퍼스타 화가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 6.25 전쟁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구요..?





거장이 그려낸 6.25 전쟁의 참상


한국에서의 학살, 1951

바로 이 그림입니다. 우리에겐 6.25 전쟁이라는 말이 더 익숙한, 한국전쟁(Korean War)을 소재로 피카소가 작업한 그림인데요. 먼 이방의 'Korea'라는, 이름도 낯선 작은 나라에서 일어난 처참한 전쟁의 참상을 기사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된 피카소. 곧바로 붓을 든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으로부터 약 1년 뒤,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작품을 완성해냅니다.


먼저 그림을 한번 봅시다. 그림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선 오른쪽의 시퍼런 회색 빛의 철기병이 먼저 눈에 띕니다. 눈, 코, 입도 잘 구분되지 않는 차가운 쇳조각 같은 이 용병들은 총칼을 든 채 한 곳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자연스레 시선이 이어지는 쪽에는 저항할 어떤 무기도 갑옷도 없이 벌거벗은 채 하릴없이 서 있는 아낙네와 아이들.. 표정이 없는 오른쪽의 병사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들은 울기도 하고 눈 앞의 죽음을 예견하는 듯 처연하게 눈을 감고 있기도 합니다.


(좌) 슬픔에 찬 여인들  /  (중) "누나 이게 무슨 일이야?"  /  (우) 이들을 가만히 겨누는 총구

좀 더 자세히 볼까요. 울고 있는 한 아낙의 목을 꽉 끌어안고 있는 한 아기가 있습니다. '저 사람들 누구야?' 하며 겁을 먹은 얼굴로 누이의 팔을 다급히 붙잡고 있는 아이도 있고요. 그 뒤에는 아직 무슨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모르는 듯 흙장난에 한창인 꼬마도 보이네요. 이 분명한 좌우의 대비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불어넣는 동시에 비극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킵니다.


우리가 이미 익히 잘 알고 있는 이 역사를 저 멀리 이국의 화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소감이 어떠신가요. 저는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그저 묻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이 그림을 왜 그린 것이냐고. 대체 어떤 끌림이 있었기에 남의 나라의 참혹한 역사를 그려낸 것이냐고요.


파블로 피카소(1881-1973)


어떻게 예술가가 다른 사람들의 일에 무관심할 수 있습니까?
회화는 아파트나 치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파블로 피카소



피카소는 누가 일으켰느냐 하는 전쟁의 원인이라던가 이념, 승패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주목했던 것은 전쟁으로 희생되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었습니다.


(좌) 폐허가 된 고향 집터를 배회하는 피난민들  /  (우) 서울로 돌아오는 피난민들  /  출처  6.25 국가기록원

6.25 전쟁의 가장 안타깝고 한탄스러운 부분은 이 전쟁의 원인이 '먹을 것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집 짓고 살 땅이 없어서'도 아닌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있다는 것입니다.


저 옛날 원시시대의 부족전쟁은 '생존의 문제'가 달린 것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상대 부족을 죽이고 승리하지 못하면 내 목숨이, 내 가족의 안위가 위협당하는 상황이었기에 불가피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우리 땅에서 일어난 이 참극은 생존을 위협당하는 소시민들이 아닌 정치인들이, 서로의 이념과 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기 위해 그들의 평범한 삶을 희생시켰다는 점에서 그 처절함과 부조리함이 극대화됩니다.


(좌) 폭파된 건물들 사이에서 무언가 찾고 있는 노인  /  (우) 피난민촌에서 어린 소녀가 풀뿌리로 밥을 짓는 모습  /  출처 6.25 국가기록원

밤에는 빨치산이 내려와 식량과 옷가지를 약탈하고, 낮이 되면 하루가 멀다 하고 국군이 찾아와서 빨갱이를 색출하겠다며 갖은 협박과 괴롭힘을 자행합니다. 당신네들은 누구 편이냐고 취조하며 그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끌고 가서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누구의 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이쪽저쪽 협조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빨치산에게든 국군에게든 무참히 죽임을 당했을 테니까요.


이 비극에는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이나 위의 사진 속 사람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세요. 그저 자신이 살아오던 터전에서 밥 먹고 농사지으며 살고 있었을 뿐.. 그 어떤 이념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상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 뒤편의 정치인들의 사리사욕과 야망 때문에 희생되고 학살당했던 이름 없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들이 과연 마르크스나 자유주의, 공산주의에 대해 알았을까요? 전쟁 속 이데올로기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삶이었습니다.


우는 여인, 1937





예술은 어떤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가지는가?


사실 피카소는 이전에도 한번 이와 같은 주제로 그려낸 작품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잘 알려진 대작 <게르니카>입니다.


게르니카, 1937

그가 자주 사용하던 강렬하고 거침없는 은 다 사라지고 오로지 만 남았습니다. 포탄을 맞고 쓰러진 이, 창에 찔려 괴로워하는 이, 불타는 집을 탈출하는 이, 죽은 아이를 붙들고 울부짖는 이.. 온몸이 구겨진 듯 부자연스럽게 꺾인 인물들의 동작은 괴기스러우면서도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아픔에 움찔-하며 공감하게 만듭니다. 극도로 단순화된 모노톤의 차분하고 무거운 색감은 오히려 작품의 주제를 더 명확하게 드러내 주는 듯합니다. 전쟁은 평화롭고 고요한 일상과 인간의 존엄성을 이렇게도 황폐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의 어느 작고 평화로운 마을이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불타고 파괴되기 전까지는요. 게르니카가 폐허로 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4시간. 그 4시간 동안 게르니카에 투하된 폭탄은 약 50톤이었는데, 이로 인해 7천 여명의 인구 중 1600명 가까이 되는 이들이 목숨을 잃고 가옥의 80프로 이상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게르니카 스페인 내전 당시 사진  /  출처  KeyStone

이 스페인 내전 역시 '이념 다툼'이 원인이었습니다. 좌파와 우파의 대립 사이에서, 그 당시 우파인 프랑코파를 지원하던 독일의 나치군이 '무기 테스트'라는 미명 하에 게르니카에 무차별 폭격을 퍼부은 것이지요. 피카소는 이 사건을 전쟁이 아닌 '학살'로 보았습니다. 분노한 그는 약 가로 7m, 세로 3m가 넘는 대형 작품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비극, 그로 인한 민중의 고통과 슬픔을 담아냈습니다.


이 작품은 그 당시 파리 만국박람회 때 전시되었고, 그 이후 '반전(anti-war)의 아이콘'이 됩니다. 전쟁으로 인한 폭력과 학살, 인권 말살을 반대하는 캠페인과 퍼포먼스 등에 활용 또는 패러디되면서 20세기 최고의 회화 중 하나로 남게 되지요.



예술가는 하나의 정치적 인물이다.
그리고 회화는 적과 싸우며 공격과 수비를 행하는 하나의 전투 무기이다.

-파블로 피카소



예술을 그저 예술로만 여기지 않고, 그 예술이 갖는 사회적 역할과 책임대해서도 결코 무지하지 않았던 피카소.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음을 알았으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술은 현실과 동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게르니카에서 비극이 터지던 그 순간부터 이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화가, 인류에 큰 충격을 준 그 사건에 대해 결코 눈 감고 지나칠 수 없었다는  화가.. 그가 그림으로 토해낸 소리 없는 아우성은, 같은 역사가 반복될 때마다 더 큰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6.25 전쟁 70주년을 맞이하며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사실 이전의 저는 개인적으로 피카소의 그림에 대해 큰 감흥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적 처음 피카소의 입체주의 그림을 보았을 때도, 다른 사람들이 피카소는 천재야- 하며 추켜세울 때도 '대체 이 그림이 어딜 봐서 멋지다는 거지?' 하는 생각뿐이었죠. (물론 입 밖에 내진 못했지만요..)


하지만 미술 도슨트 공부를 하면서 우연히 접하게 된 피카소의 이 두 작품은, 그에 대한 이때까지의 인식이나 관점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어린애 낙서 같은 그림만 그리는 줄 알았던 이 괴짜 악동이 이토록 철저하게 현실 인식에 기반을 둔 사회 참여적 작가였던가, 하고 말이죠. 자신의 운명과는 무관한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억울하게 찢기고 분해된 사람들의 삶을 저는 피카소의 그림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았던, 어린아이의 순수성과 투명성의 눈을 가졌던 한 화가 덕분에요.


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 1922

2020년 올해는 6.25 전쟁 70주년인 해라고 합니다. 이를 맞이하여 피카소의 그림을 한번 꺼내어 보고 싶었습니다. 오늘은 민족의 비극 가운데서 조용히 사라져 갔던, 그저 행복한 삶을 살길 원했던 이들을 가만히 떠올려보는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과 나의 삶을 이어주는 하나의 통로가 된, 피카소의 그림을 곁에 두고서 말입니다.



글. 아트소믈리에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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