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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Apr 28. 2019

메모. 세월호 5주기 기고글에 포함되지 못한 이야기

허수경, 권여선, 진은영, 김애란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90153.html


2019년 4월 16일 <한겨레>에 쓴 세월호 참사 관련 글이 SNS에서 6천번 가까이 공유되었네요. 많이 읽고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기고글은 댓글로 링크를 공유하겠습니다. 한달동안 준비하고 2주동안 고쳐쓴 글인데, 여러 이유로 글에 포함시키지 못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1.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것은 허수경 시인의 시 <누군가 물었다>와 권여선 작가의 <세월호라는 비애극> 글을 인용할지 여부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이건 무의식 뒤 모든 배반의 손들이 합작해서 판/ 무덤은 아니었을까요 – 허수경 <누군가 물었다> 중


허수경의 시에서는 “무의식 뒤 모든 배반의 손들이 합작해서 판/무덤은 아니었을까요.”를 인용하며,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한국 사회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무죄인가’에 대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2.

권여선 작가가 ‘실천문학’에 쓴 글은 ‘세월호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교통사고일 뿐이니 이제는 잊고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말에 대해 예외성과 정상성을 구분하는 논리에 균열을 내며 당당히 맞서는 아픈 글이었습니다. 이는 교통사고라는 논리에 대해 박민규 작가가 말했던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만큼 좋은 문장이었으니까요.


이토록 비참한 삶 속에서도 우리를 달래고 치장해 줄 오락과 상품은 넘쳐난다. 폐허 위로 상품의 소낙비가 쏟아진다. 이곳은 어떤 예외 상태도 발생하지 않는, 태평성대라는 벌집 지옥이다. 저들의 주장대로 세월호가 정상 상태라면, 그 참사는 정상적으로 되풀이될 것이다. 그러면 어떤가. 우리는 그게 현실이 아니라 비애-놀이인 양 관람하고 흥분하고 즐기면 되는 것을. 내가 직접 그 무대에서 참살당하는 그 순간까지. – 권여선 <세월호라는 비애극> 중


3.

그만큼 고민했던 것은 진은영 시인이 말했던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연민/동정과 수치심을 구분하는 논리였습니다. 니체 전공자인 진은영 시인은 “나는 연민의 정이란 것을 베풂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저 자비롭다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나도 수치심을 모른다”라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은 동정이 아니라, 수치심이라는 말을 하며 “동정이나 연민은 베푸는 사람의 마음이지 받는 이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충분히 동정해줬는데도 자꾸 사실을 규명해야 겠다니 이제는 피곤도 하고 화도 치밀 것이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동정, 연민이 아니라 인권과 연대라는 말은 수많은 사회과학적, 문학적 표현을 통해 되풀이 되는 메시지인데, 세월호에서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를 놓고 계속 고민하다가, 인용을 포기했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이 문장에서  ‘수치심’이라는 단어를 빼는 순간 글이 무너지고, 제 글에서 니체의 ‘수치심’을 설명하는데에는 적어도 한 문단이 필요한데 그렇게 되는 순간 호흡이 끊길 것 같았으니까요.


4.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4.16 참사기록단의 글을 다시 읽었습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 <다시 봄이 올거예요> 그리고 지난 주 출판된 <그 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까지를 모두 다시 읽고 계속 메모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참사 이후 의무감에서 <금요일..>과 <다시 봄..>을 겨우 읽었었는데, 이번에는 여유 시간을 두고 읽었습니다.


세월호 1주기, 2주기에 출판된 두권의 책보다도 저는  5주기에 출판된 <그 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가 더 좋았습니다. 여기서 좋았다는 것은 책의 내용이 훌륭하다는 것 보다는 앞의 두 권보다는 조금 더 차분하게 고민하며 슬픔속에 들어가게 만드는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의 두 권을 읽을 때는 슬픔에 압도되어 겨우겨우 책장을 넘겼었으니까요.


그 책에서는 한 부모님의 “저는 천사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천사도 그건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 “라고 말하는 구절을 인용할지 마지막까지 고민했습니다.


5.

여러 논문과 대담글도 다시 찾아 읽었습니다. 특히, 참사 이후 국가/사회/안전/교육 이런 단어들의 의미가 달라지는 상황, 기표와 기의가 어긋나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언어의 몰락에 대해 대응할 수 있을까에 대해 논의할 지 여부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언어의 재생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보다는 그 주장을 내 삶에서 어떻게 실천하려고 애쓰는지 보여주는 글을 최선을 다해 써보는 게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을 해서 제외하기로 했습니다.


6.

글을 쓰는 내내, 황현산의 표현을 빌리면 어떻게 해야 ‘인습’에서 벗어날수 있을지, 신형철의 표현을 빌리면 어떻게 해야 ‘인식을 만들어내는’ 글을 쓸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습니다. 상투적일리 없는 세월호 참사의 고통을 대하고 표현하는 언어가 그 방식과 내용에 있어서 상투적이지 않아야 할텐데. 어떻게 해야 상투적인 좋은/멋진 말을 피하고, 글이 직시하며 만들어내는 긴장을 통해 ‘인식’을 추구할 수 있을까.


7.

글 마지막에 인용한 김애란 작가가 쓴 <침묵의 미래>는 세월호 참사 이전에 발표되어 2013년 이상문학상 수상한 작품입니다. 그 글에서 이야기하는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는 세상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가짜로 웃고 세상이 원하는 소리를 내야 하는 이들을 전시한 세계를 지칭하는 문장입니다. 참사 이전에 쓰여진 이 소설의 애도/기념에 대한 고민이 이 기고글을 쓰는 내내 제게는 나침판같은 것이었습니다.


8.

“세월호 참사 특별 수사단” 설치와 세월호 참사 전면재수사를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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