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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Jul 25. 2019

[추천사] 보이지 않는 고통 (캐런 메싱, 2017)

서울의 한 콜센터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의 스트레스 호르몬을 측정하고 심층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3교대로 24시간 운영되는 콜센터에서 만났던 그녀는 밤 여덟 시에 시작해서 새벽 여섯 시까지 상담전화를 받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 온갖 상담전화에 시달리며 일하다 새벽이면 집으로 돌아가 중학생 자녀의 아침을 준비한다는 그녀의 하루를 듣다가 저도 모르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버티고 계신 거예요?”


그게 무슨 질문이냐는 눈빛으로 저를 가만히 쳐다보던 여성 노동자가 대답했습니다. “누군들 사는 게 뭐 쉽나요. 전 괜찮아요.” 그러나 그녀의 몸은 괜찮지 않았습니다. 스트레스 수치 확인을 위해 측정한 침샘 코티졸 레벨은 모두가 잠든 밤 시간에 치솟았고, 아침에 집으로 돌아갔을 때 다시 한 번 치솟았습니다. 마치 24시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일하는 노동자의 몸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보건학자인 저는 계속해서 이렇게 일하면 그녀의 몸이 어떻게 망가질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몇 달 뒤, 수집한 데이터를 분석하기 위해 연구실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저는 글쓰기를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 여성 노동자의 시간을 논문으로 풀어내는 게 힘겨웠습니다. 노동자 건강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사용하는 제 언어가 그들이 살아가는 현장을 담아내기에 적절한 그릇인지 계속 질문해야 했습니다. 글을 쓸수록, 그녀의 이야기와 멀어지는 것 같았으니까요.


 캐런 메싱은 그러한 학문과 현실 사이의 틈을 누구보다도 먼저 인지하고, 두 발로 뛰어다니며 온몸으로 그 간극을 메꾼 과학자입니다. 《보이지 않는 고통》에는 캐나다 퀘백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분자유전학을 연구하던 그녀가 어떤 과정을 통해 사회적 약자의 노동과 건강에 대한 뛰어난 과학자이자 적극적인 옹호자가 되었는지 생생하게 나와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은 달콤하고 아름다운 성공담이 아닙니다.


 “당신네 교수 양반들이 뭐라도 해줄 수 없겠습니까?”라는 청소노동자의 눈물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무력함, 제련공장 노동자의 특이하게 손상된 염색체 사진에는 열광하면서도 그들의 건강에는 무관심했던 유명 교수와 일하며 느낀 자괴감, 노동자를 배제할수록 연구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시스템 속에서 몸부림치던 기억, 조립라인의 노동자가 어떻게 일하는지 상상할 수 없지만 그들의 산재보상 여부를 결정하는 판사들을 보며 느꼈던 막막함이 이 책에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캐런 메싱은 이 모든 과정을 과학자로서 살아냈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녀는 자신이 출판한 140여 편의 학술논문이 노동자들의 삶을 실제로 더 낫게 만든 것 같지 않다는 냉정한 고백을 합니다. 하지만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저를 포함한 후학들에게 캐런 메싱의 논문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의 연구를 우회하고서 여성 노동과 건강에 대해 학술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과거 오랫동안 여성의 노동환경은 위험하지 않다고, 여성이 아픈 것은 신경증이나 히스테리 때문이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남성노동자들이 많은 건설업의 산업재해는 주요한 문제로 다루면서, 상대적으로 여성 노동자가 많은 서비스업 노동자들이 겪는 감정 노동이나 성희롱은 사소한 문제로 여겼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인체공학 시뮬레이션 연구는 여성의 유방이 모델링 과정에서 배제된 상태로, 화학물질 노출이 인간의 몸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생리학 실험 연구는 여성 호르몬의 존재가 고려되지 않은 상황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저는 캐런 메싱의 논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과학 연구에서 다치고 병들 수 있는 표준화된 신체는 남성의 몸이었던 것이지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며 감사했습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분투했던 과학자의 이야기를, 이토록 정직한 문장으로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자, 이제 첫 장을 펼치고, 1976년으로 돌아가 이제 막 교수가 된 한 과학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시간입니다.


https://bit.ly/2y8cAVg


* 책의 한 문단

1975년에 나는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논문심사가 끝나고 지도교 수인 서딩은 내게 축하전화를 걸었다. 5년 만에 나는 메싱 박사가 되 었고 안도와 행복감을 동시에 느꼈다. 서딩 교수의 전화에 들떠 있던 나는 학위취득 파티가 시작되기 전, 짬을 내어 부모님께 소식을 전하려고 했다. 나는 교환원에게 ‘메싱 박사’로부터 수신자부담 전화가 왔다고 전해주세요!”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전화교환원은 ‘메싱 박사’께서 실제로 통화를 하는지 확인하기 전에는 연결해드릴 수 없습 니다. 일반 전화로 연결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박사’라면 응당 남성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쿵’ 하고 나는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보이지 않는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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