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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Aug 01. 2020

갈증, 답답함, 공부

2011년에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주전공은 직업병 역학(Occupational Epidemiology)였고 부전공은 통계(Biostatistics)였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떠오르던 여러 통계 기법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것들을 연구에 적용하려 이런저런 시도를 계속했었다.


내년이면 박사학위를 받은 지 10년이 된다. 그 10년 동안 통계기법은 놀랍게 발전을 했고, 나는 그런 발전을 하나도 흡수하지 못했다. 내가 쓰는 논문은 가설이 좀 더 섬세해지고 분석 결과를 보여주고 설명하는 방식이 더 나아졌지만, 데이터를 분석하는 기법은 여전히 2011년에 머물러 있다. 통계 기법은 도구에 불과하지만, 어떤 도구를 손에 들고 있는지에 따라 보이는 연구가설도 달라지는 법이다.


작년 한해동안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머신러닝(Machine Learning)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을 했고 선형대수부터 다시 공부를 하면 여러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간단치 않았다. 새로운 주제를 배우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내 몸이 변해 있었다.


2013년 고려대 교수가 된 이후로 나는 직접 분석을 하더라도 좋은 연구 결과가 나오면, 연구실 석박사 과정 학생을 1 저자로 해서 논문을 썼다. 연구실 대학원생 교육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 내가 세상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여라고 생각을 했던 분야였다. 그래서, 좋은 학술지에 나올 수 있는 논문 결과를 찾으면 무조건 학생과 그걸 나누고자 했다. 이제 지금까지 주저자로 쓴 논문만 50여 편에 달하고, 그중 내 분야에서 저명한 국제학술지에 출판한 논문도 30편이 훌쩍 넘는다. 그런데, 나는 그만큼 학자로서 나아졌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학생들을 1 저자로 해서 쓰는 논문을 지도교수로서 감독하고 지도하는 것은 학자로서 내 능력을 배양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었다. 내가 직접 타인의 논문을 꼼꼼히 읽고 막막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문장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반복하지 않으면, 내 사고의 힘은 길러지지 않았고 그 폭은 넓어지지 않았다. 그런 수련(training) 과정에 있는 몸은, 누군가를 지도(supervise)하는 몸과 다르다. 전자가 더 고통스럽고 더 절박하다.


작년부터 계속해서 머신러닝을 공부하고 있는데, 얼마 전 처음으로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년 1학기에는 대학원에서 R을 활용한 보건학의 머신러닝 (Introduction to Machine Learning in Public Health with R)에 대한 수업을 할 예정이다. 그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 6년 동안 매일같이 만나며 함께 공부해온 두 명의 박사과정 학생과 계속 세미나를 하고 있다. 온라인 수업을 각자 듣고, 그걸 다 들으면 화면을 캡처하는 인증샷을 공동 텔레그램 방에 공유하며 서로 독려하고 있고, 주기적으로 만나 서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상의하고 있다.


머신러닝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 12개월이 넘어가는데, 왜 이제야 뭔가 다가오고 이해가 가기 시작한 걸까 싶어 함께 공부하는 연구실 박사과정 학생에게 물었다.


"참 신기하지. 분명 그때와 같은 내용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제야 뭔가 이어지고 알 것 같아. 인간의 뇌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게 신기해. 이제야 숭숭 뚫려있는 구멍이 채워지는 기분이야."

"교수님, 맞아요. 저도 그래요."

"이게 참 쉽지 않아."

"그러니까, 가장 어려운 것은 구멍을 채우는 단계가 아닌 것 같아요. 그건 즐거워요. 중요하고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여기저기 구멍 투성이인 의미를 알기 어려운 상황의 집을 짓는 단계 같아요. 그 과정은 아는 게 없는 데 계속 부딪쳐야 하니까요. "


맞다. 그 과정이 없으면 구멍이 존재하지 않게 되고 갈증과 답답함도 없다. 갈증과 답답함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 머릿속에서 더 나은 해답을 갈구하는 열정이라는 것 역시, 그걸 찾을 수 없었던 좌절의 축적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지금 내게 명확하고 이해가 가는 강의와 문장들을, 1년 전의 내가 봤다면 감탄하지 않았을 것이고 감사히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만큼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6년의 세월을 자양분 삼아 성장을 거듭해 이제는 연구 과정에서 동료로 여겨지는 이 두 명의 박사과정 학생과 내년에 대학원 수업을 함께 진행하고 그 내용을 'R을 활용한 보건학의 머신러닝 (Introduction to Machine Learning in Public Health with R)'(가제)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판할 하려 한다. 가능할 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걸 해낼 수 있다면 많이 배울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시 답답함을 매일 마주하는 공부하는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서, 그런 몸에 다시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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