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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Nov 08. 2020

<장애의 역사> 번역을 마치고

“지난 몇 년 동안 적어도 제 입장에서는 작게나마 의미가 있는 글을 써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 나이 때 저와 비할 수 없이 훌륭한 글을 썼던 사람들이 어느 시점부터는 자기 안에서 맴도는, 세상에 굳이 내보이지 않아도 되는 글을 쓰는 경우가 있잖아요. 저 역시 분명 어느 시점에 그런 글을 쓰게 될 텐데요.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추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2년 전 이맘때, 첫 연구년을 앞두고 존경하는 친구에게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답했다.


“교수님이 망가진다면, 그건 아마도 공부를 멈춰서일 거예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몸과 질병을 데이터 분석을 통해 연구하는 사회역학자로서, 내 공부의 한 뿌리는 통계학에 또 다른 한 뿌리는 인문사회과학에 두고 있었다. 2019년 연구년 한 해 동안 이 두 분야에서 모두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공부에 그토록 매달렸던 이유는 내가 사용하는 통계 기법을 확장하고 싶어서였다. 난 명백히 정체되어 있었다. 2011년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 등장하거나 유행하기 시작한 새로운 분석 기법 중 무엇도 내 연구 논문에서 사용한 적이 없었다. 지난 10년 동안 눈부시게 발전한 데이터 사이언스의 방법론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인가를 예측하는 데 있어 탁월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머신러닝은 그 뒤처진 시간을 따라잡기에 적절한 목표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또 다른 한 뿌리를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집필하면서 한 번도 장애에 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소수자 건강을 연구하는 사회역학자로서 장애에 관해 관심이 없을 리 없었다. 다만, 관련해서 나는 충분히 공부하지 못했고 그런 수준에서는 연구자로서 글을 쓰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를 할수록 장애인의 삶과 장애라는 개념이 소수자 운동의 한 가운데 있었다. 장애 인권 운동은 ‘인간의 경계’에 대해 가장 급진적으로 질문하고 몸으로 증언하며 부딪쳐 왔다.


『장애의 역사』를 번역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번역을 무사히 해내고 나면, 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 언어가 조금은 넓어지고, 조금 더 사회적 약자에게 무해한 글쓰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국제학술지 논문을 사랑하는 한국 대학의 평가 시스템에서 번역은 노력에 상응하는 연구 업적으로 인정받는 영역이 아니었고, 누구도 내게 이 책을 번역하라고 권한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책이 다루던 내용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외적인 조건만을 따지면 이 책을 번역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계속 의도적으로 밀어붙여야 했다. 관련 내용을 공부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에 나오는 장소들을 찾아다녔다. 눈으로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무엇인가를 겪고 나면 더 나은 번역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헬렌 켈러가 다녔던 퍼킨스맹인학교와 세계 최초의 농인 고등교육 기관인 갈로뎃대학교를 찾아갔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갈 때마다 관련 내용들을 먼저 찾았다.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사진과 함께 정리할 간략한 방문기는 그 경험에 대한 짧은 기록들이다.


그 방문기를 공유하기에 앞서, 『장애의 역사』를 번역하며 느꼈던 점을 적은 역자 서문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2020년 11월이 되어서야 투고하는 차별 경험에 대한 머신러닝 논문이 학술지 심사를 무사히 통과하기를, 그리고 같은 달 출판된 『장애의 역사』가 독자들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바란다.


역자 서문이 궁금한 분은 아래 링크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0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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