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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 Jan 20. 2023

30대 되면 뭐 하나쯤은 돼있을 줄 알았다

뭐 안됩니다.

대학교 1학년 필수교양으로 들었던 '리더십 특강' 강의가 기억난다.

'10년 뒤 나의 명함을 그려보세요.'


난 이제 막 수능 세대를 탈피하여 재밌게 놀고 연애할 궁리만 가득한 갓난 20대일 뿐이었다.

근데 10년 뒤 내 모습을 그리라니? 으 재미없어.

머리가 지끈지끈했지만 조금 고민을 하다 그럴듯한 답을 적는다.

'네이버 뭐시기팀의 팀장'

난 그때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단지 부모님과 사회가 원할 것 같은 모습, 이 정도면 만족스럽게 살겠구나 싶은 모습을 상상해 보니 답이 나와있었다.


그러다 나의 성숙한 30대 어른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떠올린다. 그때 상상했던 지금의 나의 모습은 대략 이랬다.

1. 일단 사람들이 다들 알만한 대기업을 다니고

2. 경력이 좀 쌓였을 테니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있겠지, 스카웃 제의도 좀 받을 테고

3. 돈도 좀 벌테니까 차가 한대 있을 거야

4. 자가는 아니지만 대출 안 낀 전셋집에서 살겠지

5. 남자친구... 아니 그땐 남편이 있겠네, 그럼 아이도 있겠지?

6. 부모님 용돈도 매달 드리고, 맞벌이일 테니 1년에 한 번 해외여행은 할 수 있겠다.


10년 뒤면 요런 느낌정도는 되어있겠지.
그래, 적절하네.

과장 안 보태고 당연히 저렇게 될 거라 생각했다. 10년의 세월은 그러기에 충분한 시간이라 믿었다.





그로부터 13년이 흘렀다.

뭐시라, 벌써 13년이 지났다고?

그렇다. 10년의 세월은 그러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경험적 실험(?)으로 그 어려운 걸 내가 증명해 냈다.

자, 하나씩 체크해 보자.


1. 사람들이 다들 알만한 대기업을 다녀본 적이 없고

2. 개발 일하다가 때려치우고 디자이너 되겠다고 일본 나갔다가 적성에 안 맞아서 또 때려치우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날보다 소외되지 않기를 바라는 날들이 더 많았다.

3. 차? 전남친의 영향으로 차를 즐겨마시는 습관은 생겼다.

4. 대출 낀 반전세 집에서 살고 있고

5. 그 죽고 못살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연애와는 거의 담쌓다시피 몇 년을 살고 있고

6. 그래서 불효자는 울 자격도 없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문득 내가 굉장히 불쌍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위로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무엇 하나 내 예상대로 된 거 하나 없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왜 만족스럽냐고?


나는 내가 대기업에 맞는 인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혼자 일하거나 소규모의 집단에서 자유롭게 일할 때 능률이 올라가고 편안함을 느끼는 타입이다.

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보단 나 스스로에게 먼저 인정받길 갈망한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재밌게 일하는, 반짝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순간들이 쌓여 무너져갈 때즈음 일을 멈췄다.


차를 살 만큼의 여유가 있더라도 무서워서 웬만하면 운전 안 할 거다. 그리고 난 걷는 걸 무지 좋아한다.

지금 사는 집은 방 두 개라 혼자 살기 충분히 넓고(두 사람이 다리 뻗고 누우면 꽉 차는 원룸에 살아본 경험자로서 이 정도 크기는 천국이다) 내가 원하는 인테리어를 해놓고 살고 있다.


헤어진 그 친구와 결혼했다면 난 평생 외로웠을 거다. 그걸 깨달아서 헤어졌기 때문에 손톱 때만큼의 미련도 남아있지 않다.


돈도 좋지만 무엇보다 자주 연락하고 집에 가고, 언니랑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최고의 효도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엄마한테 연락하고, 언니랑도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잘 지낸다.



여태 나는 되고 싶은 것만 생각하고 살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불행했다. 불행한 이유를 몰라서 어디서부터 내 인생이 잘못됐나 화풀이할 곳만 찾아다녔다. 작년 겨울, 일본에서 두 번째 직장마저 관두고 모든 걸 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 답답하고 괴로운 마음에 자신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33년 만에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시작했다.


뭔가가 되려는 데 집착하지 않고 현재의 나에게만 집중하다 보니 한결 맘이 편해졌다.

멋진 커리어우먼, 사랑받는 여자친구, 자랑스러운 딸.

모두가 그렇게 되면 좋고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하루하루 잘 살아가는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 한다면 행복하다.


지금의 내가 된 것이 만족스럽다. 그 무엇이라 남들에게 설명하고 규정하긴 힘들지만 그냥 지금의 내가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설령 이 생각에 누군가 비웃는다면 '응, 아니야'라고 말하면 된다. 그 사람은 나를 아끼는 사람이 아니니까 나도 그 사람에게 말을 아끼지 않아도 된다.



Photo by Martin Rei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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