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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톨 Mar 20. 2017

더 좋은 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의 가치를 아는 캐나다살이

이곳에 온 지 한두달쯤 되었을 때 '아, 이만하면 충분해' 라며 안정감이라는 걸 느끼게 된 순간이 있었고 그게 평화의 최고점일 줄 알았다. 그러나 더 좋은 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가는 날을 하루하루 세고 있는 지금, 궁극적으로는 '돌아간다'는 생각이 나를 들뜨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만나는 모든 인연이 소중하고 아쉽고 자꾸만 생각나고, 또 점점 좋아지는 이곳의 날씨를 보며 내가 처음 왔을 때 이 날씨의 반의반만이라도 되었다면 적응하기 쉬웠을텐데-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지금은 긍정적인 의미로 다양한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요동치고 있다.


지난 금요일을 기점으로 세 번째 종강을 맞이한, 뒤늦게 하는 어학연수 이야기 조금 더-




만학도의 열의


분명 아직은 만학도라고 칭할 수 없는 젊은 나이다. 특히 이민자의 정착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우리 학원에는 열정 넘치는 50-60대 클래스메이트들이 있으니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한국에서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이곳에 온 ‘다수’를 차지하는 나이대의 학생은 아니니까 오늘만 그렇게 표현해보기로 한다.


나이로 인한 서열이나 순서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곳에서는 나이에 대해 민감할 일이 없다. 누군가 내게 나이를 물어볼 때 고민도 없이 한국나이에서 2살을 뺀 이곳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실은 좋기도 하지만, 나이로 순서를 매겨 사람들을 구분해서 기억하거나 높임말을 쓰던 때와 달리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생활방식과 문화의 차이가 이곳엔 있다.


그럼에도 내가 친구들보다 기본적으로 5-6살 많기 때문에 느끼는 점은 첫째로, 클래스메이트들이 그렇게나 귀여워보일 수가 없다는 것. *_* 그렇게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던 내가 먼저 말을 걸고 스스럼없이 다가간다. 아마 한국에서 나를 알던 사람과 이곳에서 나를 처음 안 사람이 나에 대해 갖는 인상은 많이 다를 것이다.


그리고 학습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학생이 되었다. 배우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알기 때문에 좀더 열의 있는 학생이 될 수 있다. 이미 쓰임을 알고 있는 문법과 뜻을 알고 있는 단어를 어떻게 ‘말하는지’를 배우는 것이라 지금까지 해왔던 공부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 또한 참 흥미롭다.




대책은 없는 여유


뒤늦게 온 어학연수의 장점으로는 경제적인 부분의 여유도 빼놓을 수 없다.


나의 경우 한국에서 회사를 들어간 후를 기점으로 소비습관이 아주 많이 바뀌었다. 대학생 때 백화점 근처에 살았음에도 옷 한벌 쉽게 사입지 않았던 때묻지 않은 학생이었다면, 회사에 들어간 이후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나를 위해 소소한 소비를 즐기게 되었다. 통 큰 소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간이 큰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때 산 것들도 모두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이를테면 퇴근 후 괜히 화장품가게에 들러 매니큐어 하나를 사서 집에 돌아가는 정말 소소한 소비) 그렇게 소비를 즐기게 된 점이 돈을 벌지 않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부유한 워홀러네요



첫 단기 숙소를 구할 때 호스텔을 일찍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원하는 조건과 정확히 일치하는, 밴쿠버에 있는 모든 집을 둘러볼 만큼의 체력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단기숙소로는 '마스터룸'이라는 2명이 사는 용도의 방을 계약해서 보름을 지냈다. 꼭 그 집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지쳐 있었던 때이기도 하고, 단기숙소인데 뭘-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심히 여유로운 선택으로 보였을 수 있겠다.


주인이 일은 언제부터 할 거냐고 물었을 때 "일할 계획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배짱. 일을 할 수 있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갖고 있음에도 마스터룸을 계약하고 일을 할 계획이 없다는 내게 "부자 워홀러네요"라고 한 마디를 건네던 주인. 그의 말을 들었을 당시엔 비꼬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워킹'만 해도 되고 '홀리데이'만 해도 되는 자유로운 비자인데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 나는 부자가 아니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당분간, 어쩌면 당분간보다 더 오래, 실업자인 20대 후반으로 지내야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부자인 축에 들어가는 워홀러의 신분인 것이다.


그것 말고도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 라떼를 매일 사마실 수 있는 것. 대표적인 이곳의 명소나 근교 여행지에는 가보지 않았지만 유명하다는 카페에는 대부분 가본 것. 무려 네달 만에 스타벅스의 골드회원이 된 것.(회사 다닐 때도 2500원짜리 라떼 먹고 좋아하는 삶이었는데 웬걸) 그리고 꽤 자주 나를 위해 고기를 사서 만찬을 즐긴다거나.


영어에 대한 투자도 그렇다. 돈이 드는 것도 합리적인 수준이라고 판단을 하면 과감히 투자할 수 있다. 오랜 경험은 아니지만 3-4번 튜터 이용도 해보고, 학원 이외의 회화클럽을 등록해서 다니기도 한다. 어쩌면 이건 '가진 돈'의 차이라기보다는 '시간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영어공부에만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 시간만큼은 아낌없는 투자를 하게 된다. 이렇듯 돈을 벌지 않음에도 하고 싶은 것들을 지속하면서 공부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그리고 정말 작은 것이지만, 수업시간에 할 이야깃거리가 남들보다 조금 더 풍성하다. 지난번 학원에서 노동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할 때 할 말이 제일 많았던 건 서른 살의 일본인 친구와 나였고, 이번 학원에서도 한 친구와 깊이 친해질 수 있었던 건 서로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면서부터였다.


뒤늦게 하는 어학연수라 100% 좋아요! 가 아니라, 20대 초반의 나이에 어학연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는 만큼 지금에 와서도 다른 측면의 좋은 점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고 말하고 싶다.


애석하게도 돌아갈 학교가 있는 친구들보다 돌아가서의 삶에 대해서는 대책이 훨씬 없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삶이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몇몇 이유는 이전 회사가 4년 동안 내게 준 고마운 것이기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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