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번째 날(6/4)
북적북적. 시장 특유의 북적대는 느낌이 좋다. 마트와는 또 다른 느낌인데, 그중에서도 오일장이 가장 좋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제주도에 살 적에 제주민속오일장에 가서 혼자 알차게 5만원어치(넘었던가) 장을 봐 온 후 뿌듯해했던 기억이 있다(평소엔 저렇게 지르지 않았다;;;). 도너츠, 오메기떡, 찬거리 그리고 수면바지까지. 생각해보니 이것도 퇴사 후였다. 이날 버스 정류장에서 동네에 살던 회사 동료와 했던 통화가 기억난다.
"뭐해?"
"오일장 왔는데"
"혼자?"
"혼자지. 나 5만원어치 질렀어. 헤헤"
"어휴~"
대충 이런 대화였던 거 같다. 제주도에서 유난히 나는 장보는 걸 좋아했다. 좋은 식재료를 사면 마음이 든든했다. 뭔가를 마음껏 소비할 만한 재정적, 마음적 여유가 없었던 나는 신중하게 고민해가며 주로 먹는 데에 소비를 전념했던 거 같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하긴 생각해보니 주말에 짬이 나면 혹은 퇴근길에도 그랬던 거 같다. 동네 동료와도, 선배와도 이런 이야기를 자주 나눴다.
"끝나고 뭐하게?"
"장 보러 갈 건데요~"
"오늘도 끝나고 장 보러 가?"
"당연하죠"
허기진 마음을 채우는 데 가장 효과가 있었던 건 주로 냉장고 혹은 내 배를 채우는 일이었다. 배까지 굶주릴 순 없었음에도 실제로 배 곪는 날이 많아지자 더욱 '먹는 것'에 마음이 갔다(원래 중시하는 부분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제주도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 스스로 냉장고를 채우는 일의 힘겨움을 어렴풋이 느끼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제주도에서 진행 중이던 전시회에서 한 그림을 보고 처음 느껴보는 뭉클함을 느끼기도 했다.
얼마나 뭉클했던가. 어둠 사이로 새어나오는 밝은 빛. 어두운 밤 냉장고 문을 연 누군가의 뒷모습. 살아가는 건 역시나 쉽지 않다. 사는 것은 빈 냉장고를 채워나가는 일이지 모른다. 날 위한 식량과 함께하는 이의 갈증과 배고픔을 해결해줄 무언가를 함께 채워가는 소중한 경험인지도. 그걸 알기에 바나나 하나를 사든 양배추 하나를 사든 품 안에 먹을 게 있으면 괜히 든든했다. 그런 날들이 있었기에 장을 보는 행위는 좀 특별한 느낌이다.
그런 나에게 시장 중 으뜸은 오일장이었다. 개인적으로 제주시 동문시장은 너무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느낌이 들었고, 서문시장은 걍 별 느낌이 없었다. 시장의 시끌벅적함이 정겹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할까. 그래도 서귀포 매일올레시장은 덜한 느낌이어서 괜찮았지만...
이날 방문했던 오일장은 서귀포 향토오일장. 제주시민속오일장처럼 도민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다.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곳. 주차전쟁이 어마어마해 차를 가져가기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훨씬 나을만한 곳이다(얼마 전에 제주시민속오일장을 찾았던 선배가 그때도 차가 어마어마하게 많아 고생 꽤나 했다는 말을 했다).
이곳에서 영혼의 단짝 떡볶이를 먹고. 사실 그보다 눈길과 마음을 끌던 튀김도 주문하고. 사실 그전에 시장에서 핫하다는 녹차 호떡도 먹어보고. 헤헤헤.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로 가서 앉아있을 만한 곳을 찾았으나 못 찾은 것인지 쉴 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었다. 고객센터 앞에는 상인들 쉼터가 조성돼 있고, 상인들은 주로 담배를 피우고 있어 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간판과 그보다 더 씩씩한 상인들을 볼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