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동아줄

남자친구, 왔다리

스물아홉번째날(6/18)

by 하얀

성공적인 여행을 위한 필수조건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좋은 날씨, 넘치는 체력, 경제적 여유 그리고 기꺼이 발이나 눈이 되어줄 파트너 아닐까. 이날은 조르고 졸라, 고르곤졸라가 될 뻔한 나를 위해 제주를 한 번 더 찾은 짝꿍이 왔다. 운 좋게 쓰려고 했던 휴가보다 하루를 더 써 목, 금, 토, 일 3박 4일 일정으로 다시 온 짝꿍. 늦은 오후에 도착한 데다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져 이날은 딱히 아무 데도 가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생리까지 겹쳐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가기로 한 카페에 가서 빙수를 먹었고, 가고 싶었던 고깃집에는 가지 못했다. 대신 닭을 시켜 먹었다. 인생은 다 주지 않는다. 여행은 계획대로만 되지 않는다. 이번 여행을 통해 얻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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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간의 제주살이는 여행이기도 했지만, 생활 그 자체이기도 했다. 풍경 좋은 카페에는 이미 함께 가보았으니, 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긴 카페에도 함께 가보고 싶었다. 맛보고 싶었던 빙수를 함께 맛본 것만으로도 이날은 나름 행복했다. 내가 컨디션이 좋았다면 정말 하고 싶었던 것도 하고, 짝꿍이 덜 배불렀다면 고기도 먹고(공항에서 햄버거 먹음. 취) 그럼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주어진 조건에선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다시 느낄 수 있었던 짝꿍의 체온만으로도 한 달 내내 따라다녔던 긴장감을 풀어주기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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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부른 짝꿍은 배고픈 나를 위해 치킨을 시켜주었고, 닭은 역시 뼈 있는 닭이지만, 뼈를 먹는 짝꿍은 순살치킨을 먹어야 했다. 그러니까 벌써 일주일 하고도 하루가 더 된 유월십팔일. 제주에서의 스물아홉번째날. 이날 역시 나는 남은 짐 몇 개를 새로운 주인에게 떠나보냈고, 빌렸던 책을 반납했다. 역시나 시간 조절은 실패해 오랜 시간 짝꿍을 기다렸지만, 기다리는 게 마음적으로 편한 나였으니까. 일주일이 더 지났는데도 함께 먹던 빙수의 소박하지만 정성 듬뿍 담긴 맛이며, 닭의 맛이며, 안고 있을 때 느껴지던 평온함 같은 건 그대로 기억난다. 삶뿐만 아니라 추억도 늘 진행중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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