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동아줄

좋게 생각하면, 좋았던 거다

서른 번째 날(6/19)

by 하얀

머무는 내내 편안하지만은 않고, 좋지만도 않았던 숙소였음에도 한 달을 머물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발걸음을 떼기가 뭔가 아쉬웠다. 이런 생각은 호근동 숙소를, 서귀포를, 제주도를 떠나기 며칠 전부터 문득 고개를 들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아쉬운 그 길을 함께 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 힘이 됐다. 사람이란 얼마나 감정에 약한 동물인가. 나는 또 얼마나 그러한가. 좋게 생각하면, 좋았던 거다. 나는 그곳에서 충분히 게으를 수 있었고, 마음껏 슬퍼했고, 거의 매일 그 감정들을 바다를 보며, 파도에 실어 보낼 수 있었다.



P1120956.JPG 제주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모습 중 일부

부슬부슬. 전날에 이어 비가 내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숙소를 떠나던 이날은 짐을 챙겨 나와 숙소 앞 바다에 잠시 들러 사진을 찍을 때 즈음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비는 다행히도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야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어쩌면 완벽했는지도.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판포리였다. 판포리에 들렀다가 애월읍 돌고래 전망대에 가기로 했다. 이틀 동안 머물기로 한 곳이 돌고래 전망대였는데, 버스를 갈아타지 않는 대신 2시간 40분이 걸리는 여정이라 중간에 쉬어가기로 한 것이다. 판포리는 애월에 있는 전 회사 동기 언니네를 왔다 갔다 하면서 우연히 보게 된 곳인데, 어떠다 마주친 곳치곤 예뻐도 심히 예뻤던 탓에 달리는 버스 안에서 처음엔 눈에만 담았다가, 나중엔 사진을 찍어보기도 했던 곳이었다. 정말 예뻤는데, 한적해 보여 더 마음을 뺐었던 곳이었다.


P1120990.JPG 대략 이런 정도의 푸르름을 간직한 곳.
P1120979.JPG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르던 바닷가.
P1120961.JPG 새로 문을 연 카페에 그보다 더 먼저 터를 잡은 거 같은 제비도 보았다.


허기진 배를 흑돼지와 해물뚝배기 등으로 구성된 점심 메뉴로 든든하게 채우고, 시원한 청귤차 한 잔을 마시고, 잠시 짐을 내려놓고 산책을 떠났다. 음료를 주문하며 사장님께 물어보니 이곳 역시 가끔 돌고래가 보인다고 했다. 아쉽게도 돌고래는 보지 못했지만 대신 찬찬히 걸으며 한적한 제주 바다를 보고 또 볼 수 있었던 곳, 판포리. 역시나 짧은 인연은 아쉬웠으나 제주에서 머물며 만난 풍경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다. 좋을수록, 아쉬울수록 더 빨리 가는 우리들의 시계는 이곳에서부터 평소보다 더 빨리 돌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P1130046.JPG 안녕 애월. 반가워 돌고래 전망대야.


아쉬움을 안고 다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다시 또 새로운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바로 2박을 묵기로 한 애월읍 돌고래 전망대 쪽. 새로운 곳에 짐을 풀며 조금은 더 쾌적해진 숙소 환경에 들떴던 거 같다. 이곳에선 돌고래를 볼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있었고, 또 어떤 바다가 펼쳐질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긴 했지만, 짐을 풀고 조금 쉬었더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나가 일몰을 담아보기도 하고, 그러다 식당이 문 닫을 시간이 되어 가보고 싶었던 곳엔 가지 못했지만 대신 편의점 음식으로 낙지볶음밥부터 과자, 아이스크림까지 파티를 펼치기도 하고. 역시, 세상은 다 주진 않지만, 좋게 생각하면, 좋았던 거다.


P1130047.JPG 숙소 앞에 있던 야자나무를 앵글 가득 담아도 보고.
P1130052.JPG 너무 반가운 직박구리를 또 앵글에 담아보고.
P1130067.JPG 일몰도 담아보고.
P1130068.JPG


일몰을 담고, 다시 숙소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쯤 바닷가엔 다시 불을 밝힌 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던 날씨 좋은 날. 생각해보니 호근동에서 판포리로 이동할 때 빼곤 비도 오지 않았다. 자느라 언제까지 비가 왔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렇다. 나는 좀 들떴고. 속으로 계속 이 말을 외치고 있었다.

안녕, 반가워. 고래 전망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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