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동아줄

세상은 다 주지 않는다

번외 2. 귀엽지 않은 것들

by 하얀

세상엔 귀여운 것들이 많다. 보고만 있어도 미소 짓게 하는 귀엽고 아름다운 것들이 무궁무진한 것이다. 제주에서는 나비와 새, 돌고래, 돌, 꽃들을 비롯해 추억을 선물 준 진돗개 재인이 등이 그러했다. 나는 그것들을 카메라에 다 담고 싶었는데 순간 포착해내기엔 불가능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그게 못내 아쉬웠다. 좋은 것들을 기록하고, 기억에서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는데 사실상 그런 건 불가능했다.


반면에 귀엽지 않은 것들도 만나야 했다. 거미를 비롯한 각종 벌레는 사실 조금 익숙한 느낌도 없지 않았는데, 처음 보는 다리 많은 친구들을 직접 보게 된 건 정말이지 조금 충격적이었다. 그리마와 지네도 그랬을까. 전설의 고향에서나 보았던 지네를 직접 보다니(만나지 않았다면 서로 더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짝꿍은 내게 어떻게 지네를 처음 볼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부모님께 물어보니 딱히 부모님도 지네를 본 기억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 안 볼 수 있다면 더 좋은 거겠지. 시골인 친가, 외가에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니, 제주에서 살면서도 소리 소문처럼 들었던 지네를 처음 볼 수 있었던 건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에 머문 덕이 아닐까 싶다. 숙소 방 안에서 본 지네는 생각보다 크고, 길며 무엇보다 빨랐다. 그렇다. 길에서도 많은 벌레들을 마주쳤지만 그게 길이라면 무슨 상관이겠는가. 돌아가면, 도망가면 그뿐인 것을. 하지만 집에서 만나는 벌레들은 달랐다. 거기다 그것이 지네라면 더 달랐다.


나는 지네에 물리고 싶지 않았다. 지네도 나를 물고 싶지 않았던 건지 빠르게, 아주 빠르게 이동했다. 어디서 어떻게 들어온 건지 알 수 없는 녀석은 바닥에서 벽을 타고, 순식간에 방충망으로 도망쳤다. 길에서 마주친 말라죽은 지네는 길지 않았는데, 애기 지네였던 걸까. 어찌 됐든 나는 지네를 잡을 자신이 없었고, 숙소 사장님께 연락을 드렸다. 지네는 그렇게 갔다. 떠났다.


그날 후로 나는 방을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자다가 물릴까봐(지네에 물리면 이빨 자국이 남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자주 도망가던 지네의 현란한 몸놀림을 떠올렸다. 그리고 김연수 작가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에 묘사된 장면을 떠올렸다.


석 달 조금 못되게,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그는 곤충들이 부럽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예컨대 지네는 다리 열 개를 잃고도 다리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냥 도망간다.('어쩌면 다리가 너무 많은 것일지도.') 베짱이는 다른 포식자에게 자기 몸이 씹히는 와중에도 열심히 먹이를 먹는다. ('이것 역시 배가 너무 고파서.') 교미가 끝난 수컷 사마귀는 암컷에게 머리가 먹힌 뒤에도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사랑에 열중한다. ('하긴 어렸을 때, 동네에 그런 아저씨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도 있었지. 누군가 목을 잘랐어도, 아마 그 사람이라면...)
"그것들에게는 통증이 없기 때문이지. 그걸 단순히 통증이라고 할 순 없겠지. 그건 고통이라고 불러야만 해."


다리를 잃고도 그 사실을 모른 채 그냥 도망간다니... 어쩌면 나에게 기억될 지네의 모습은 도망가는 지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말린 지네의 모습일지도. 내가 본 지네는 조금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붉은 제주산 지네는 네이버 쇼핑몰에서 45~50마리에 20만원 안팎의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벌레의 삶도 참 기구하다. 환영받지 못한 채 살다 떠나는 삶이라니... 숙소 방에서 만난 귀엽지 않은 것들은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직은 조금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래도 그 방에 머무를 땐 귀엽지 않은 것들이 주는 공포감이 더 큰 것 같았는데, 집으로 돌아오니 그것 또한 추억이 된 듯하다. 귀여운 것들 덕분일까. 아니면 이젠 볼 일 없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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