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올해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살아남은 것이다. 몇 주에 걸쳐 되뇌기만 했던 문장을 옮겨본다. 누가 뭐래도 나는 살아남았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초등학교 시절 '자정(自淨)'이란 개념에 대해 배웠을 때가 생각이 난다. 자정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오염된 물이나 땅 따위가 물리학적ㆍ화학적ㆍ생물학적 작용으로 저절로 깨끗해짐. 믿을 수 없을 만큼 신기했고, 좋았다. 오염된 자연이 스스로, 저절로 깨끗해질 수 있다니. 자정이란 말에 담긴 '힘'이 좋았다. 파도치는 모습이 연상되었고,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다가 깨끗해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깨끗하고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올해는 유독 힘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먹혔을 주문 같은 게 먹히기는커녕 떠오르지조차 않았다. 힘들 땐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라는 말을 오래전 어느 공익광고 같은 데서 본 것도 같다. 그러나 조력자 같은 건 없었다. 힘들다고 말하면 너만 힘드냐는 날 선 말이 돌아왔다. 다들 힘들어도 잘만 버티는데 나는 또 버텨내지 못했다. 악몽을 자주 꿨고, 안 좋은 기억 속을 맴돌았다. 자정과 같은 단어를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 어디 나뿐만 이었을까.
살아남았지만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쉽게 무기력해진다. 그럼에도 슬며시 자연 치유력 같은 단어를 떠올려본다. 회복되는 몸과 마음을 기대하는 것이다. 올해가 다 갔으니 안 좋았던 일도 이제 그만 끝났으면 하는 것이다. 내년엔 조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때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나아질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어디 나뿐만 일까. 나아가야 하는 '나들'이. 청춘이. 희망이.
몸과 마음이 저절로 회복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생각하고 정리해 나갈 것이다. 저절로 회복될 수 있도록. 바다를, 파도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파아란 파도. 파도가 칠 때마다 정화되는 바다의 모습을, 자정의 힘을 떠올려본다.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