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못생겼다는 말을 꽤 들었다. 엄마한테서였다. 왜인지 엄마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하곤 했다. 그 말들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고, 상처가 됐고, 나는 자주 울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에 입원한 엄마를 간호하고 있던 어느 날. 엄마는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잠시 어딘가에 가있으라고 했다. 관리 안 된 머리가, 예쁘지 않은 내가 부끄럽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재학 중이던 내 대학을 거짓말했는데 그게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너라는 존재가 창피하다, 창피하다, 창피하다, 로 들렸다. 그날도 울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파마기가 적당히 풀려 어정쩡했던 머리는 대충 기억난다. 에휴, 하고 돌아서던 모습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반면 아빠는 내가 예쁜 편에 속한다고 말하곤 했다. 항상 그 말을 진지하게 해서 오히려 민망해지기도 했다. 나는 예쁜가, 아니면 예쁘지 않은가. 아니 근데 꼭 예뻐야 하나. 솔직히 예뻤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피부가 깨끗하고, 날씬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인상이 좋았으면 한다. 문제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에 쉬운 것은 없다. 타고난 사람도 평생 관리를 해야만 외적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다. 그렇다면 포기다. 예쁘면 좋겠지만야 꼭 예뻐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없다.
연애 기간 내내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봐준 남자친구가 있었다. 항상 내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말해주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거의 민낯으로 만났다. 화장을 할라치면 그냥 편한 대로 하면 된다고 말해주던 그였다. 무언가 바르는 걸 귀찮아하는 날 배려해준 거였다.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최고로 예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준 사람들 덕분에 외모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그보다 외모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엄마는 같은 반 남자친구를 못 생겼지만, 착하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분노했으나 나에게 그 친군 예쁘고 소중한 친구였다. 그러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무하게도 엄마에게 있어 예쁜 사람은 쌍꺼풀 있는 사람이라는 걸 한참 뒤에서야 알았다. 외모는 단순히 취향에 불과한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 마법의 주문은 다른 곳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꼭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하는 건 아니잖아. 엄청난 직장에 다녀야 하는 건 아니잖아. 명품을 들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좋은 차를 타야 하는 건 아니잖아. 대신 가능한 만큼 노력해 대학에 가고, 정정당당하게 취업에 성공하면 된다.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하며 자신이 받은 스트레스를 다른 사람에게 풀지 않으면 된다. 명품이나 외제차만을 좇는 게 아니라 재정 상태와 취향, 장단점 등을 꼼꼼히 따져 소비하면 된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러니 꼭 모두에게 예쁠 필욘 없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