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차 취향입니다.

by 양손

자동차 부품 장사라는 지금의 직업을 갖기 전까지 나이에 비해 꽤나 많은 직업을 거쳐왔다.

입시미술을 거쳐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디자이너 였으며 삼성 반도체 공장에 전선을 깔던 노가다 였고, 스물넷에 커피집을 낸 오너 바리스타 였다. 수입중고차 딜러도 했었고, 중간에 무려 공기업에 입사한적도 있었다.

남들 하는거 해보고 싶어서 들어갔다 1년도 못버틴 회사생활을 제외하면 나는 돈이 되는 쪽보다 가슴이 뛰는 쪽을 택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소개할 수 없다는 식의 발전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억지로 뭔가를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었을 뿐, 남에게 잘보이려 뭔가를 하는걸 견딜 수 없는 인간이었을 뿐이다.


몇년 쯤 지나고나서 멀찍이서 나를 다시 돌아보니, 나의 소질은 '취향' 에 있었다.

그냥 그때그때 하고싶은거, 할 수 있는것 중에 가장 재미있는것을 찾았다고 생각했었다. 당연히 삶을 관통하는 큰 주제따위 존재하지 않을것이라 생각하며 살고있었는데, 그와중에 나름 비슷한 방향으로 발전했나보다.

학교다닐 때 전공한 디자인의 영향일수도, 남이 뭐라면 '왜?'부터 생각하는 삐딱한 내 성격탓일수도 있다. 신기하게도 나는 나의 취향만큼이나 다른사람의 취향도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인 것이다. 동시에 그것을 지켜주거나 공감하는 것에 꽤 큰 보람을 느끼는 인간인 것이다. 나의 취향을 존중받기 위해 시작한 일종의 꼼수가 소질이 된 경우라고 볼 수 있겠다.


고객의 취향을 존중하고, 동시에 나의 취향 또한 신경쓰며 자동차 부품딜러로 몇년간 살아온 결과 신기하지만 쓸모없는 능력을 한가지 갖게 되었다. '망하는 차'를 상당히 정확하게 맞추는 능력이 바로 그것.

출시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제조사에서 생산계획을 발표하는 순간부터 바로 알 수 있다. 내 마음에 쏙 들면 들수록 빨리, 크게 망한다. 내가 마음에 쏙 들어하는 자동차들의 공통점은 '차는 좋은데..' 또는 '외국에서는 잘팔리는데..' 로 시작하는 꼬리표를 단종할 때 까지 달고다니는 차종들이라는 점이다. 주로 웨건과 해치백, 가솔린 SUV와 커다란 자연흡기 세단들이며 국산차와 수입차, 신차와 중고차를 가리지 않는다. 물론 먹고살고자 하는 관점에서는 망하는차 말고 흥하는 차, 다시말해 대중적인 취향을 맞추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따위로 생겨먹은 인간인 것을. 좋고 싫음이 지나치게 분명한 인간인 것이다.


벨로스터 N 의 구매고객들을 상대로 현대가 마련한 트랙데이 인터뷰를 보다가 무릎을 탁 친 적이 있다.

빠른 차를 타고싶은 마음은 아이가 있건, 결혼을 했건 다르지 않은데 'N'이 벨로스터 단일차종으로 출시되었기에 많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구입했다고. 아직 아이가 어려서 벨로스터 뒷자석에 카시트로 충분하지만 i40N을 기대하고 있다고.


알고있다. 일반인들도 아는거, 업계종사자가 모를리가 있나.

막상 돈들여 만들어서 판매하면 코닉세그보다 보기 힘든차가 되겠지. 휘발유를 에쿠스만큼 먹는 수동미션달린 시끄러운 웨건을 누가 사겠느냐는 말이다. 스무살짜리 애도 아니고 차막히는 대한민국 시내주행에서 빨라봤자 얼마나 빠르고, 밟아봤자 얼마나 밟는다고. 같은돈이면 쏘렌토를 살텐데, 와이프한테 등짝 맞아가며 그돈주고 사겠느냐는 말이지.


하지만 안마의자 회사에서 슈퍼카를 들여다 팔아먹는 정도의 나라라면, 치킨먹으러 슬리퍼신고 S클래스 타고 나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수준의 나라라면 말이다. 택시를 미드쉽으로 만들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트럭에 트윈터보 달아달라는 것도 아닌데, 동급 세단보다 쪼금 잘나가는 웨건정도는 만들어 줄 만 한거 아닌가?

M5투어링이니, E63 웨건이니, 아반트 RS니 바라지도 않는다. 이미 나와있는 2.0터보엔진정도 올려줄수도 있는거 아닌가. 이 코딱지만한 나라에서 무려 헬켓을 타고, 마트 주차장에 잘 들어가지도 않는 실버라도를 직수입해서 타는 수준의 나라다. 양적으로 팽창할만큼 팽창했으면, 돈 조금 덜되더라도 소수를 위한 질 높은 투자도 해야만하지 않은가 말이다.


폴스타도 타는 사람들이 i40N 나오면 과연 현대라서 안살까? 내 생각에는 산다.

폴스타까지 갈 것도 없다. 티구안 타는사람들도, 320d 투어링타는 사람들도 산다.

1억짜리 SUV 누가 좋은거 모르나. 다 안다. 하지만 누구나 1억짜리 차를 탈 수 있는건 아니지 않는가. 실제로 살 수 있고, 사야하는 차종들 중에서 조금 더 빠르고, 고급스러운 모델들을 고를 수 있게 해달라는건 이정도 자동차문화가 발전한 나라에서 소비자들이 충분히 할 수 있고, 제조사 측에서도 귀담아 들을 만 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돈되는일만 열심히한다는 제조사의 이미지 개선도 할 겸, 고성능에 길들여진 미래의 고객님들을 유치할 겸 말이다.


i40 터보와, 통풍시트 달린 레이 벤. 구형 에쿠스를 위한 순정 블루투스 키트와 수동미션 스팅어를 꿈꾸는 나는 확실히, '망한차 취향' 이 맞다. 덕분에 각자의 이유로 망한차 취향이 된 다른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상하다고 느끼는 대신 무릎을 치며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코딱지만한 동네 부품가게 아저씨인 나도 공감하는데, 현대니 기아니 이미 알고 있으리라. 나같은 동네 아저씨가 하면 망한차 취향이지만, 커다란 제조사가 한다면 아주 작은 고객의 니즈도 세심히 살피는 나노단위로 섬세한 마케팅이 될테니까. 심지어 아주 감동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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