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매년 찾아오는 3월이었지만 그 해 3월은 나에게 특별했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난 날,
내가 입었던 옷
내가 신었던 신발
버스 번호
급하게 먹었던 아침 식사
가방에 든 소지품
버스정류장의 풍경
모든 것이 또렷하다.
차가운 공기
바람의 냄새
긴장과 설렘으로 자꾸 오줌이 마려운 것 같던
그 날의 기분이 여전히 기억난다.
나무로 만들어진 묵직한 교실문을 열던 그 느낌
16년을 학생으로 여닫던 그 문을
이제는 교사가 되어 열게된 그 새로움
내 발걸음을 따라 바쁘게 움직이던 사슴같던 눈망울들
교실속의 내 자리가 책상이 아닌
교단이라는 것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그렇게 나는 그 아이와 처음 만났다.
모든 일에 열심이던 그 아이는 매일이 인상적이었다.
선행학습으로 점철된 아이들 속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재미를 느끼는 그 아이는 유난히 빛났다.
모두가 흘려적는 교과서 한쪽을
누구보다 정성들여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해내는 아이였다.
프로젝트 학습이 진행될 때면
누구보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토론수업이 이루어질 때면
스스로 조사해온 자료들을 늘어놓는 유일한 아이였다.
내 머릿속에 있던 여러 이상들을 실현시키기 바빴던 나의 하루를 되돌아보게하는 아이였다.
매일이 도전하는 하루가 되어버린 서툰 나를
꼿꼿한 자세로 지켜봐주었다.
그 아이는 각종 대회에 성실히 참여했고,
어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 아이 작품들은 남달랐다.
즐거운 토요일을 위하여 준비한 파티가 무산되지 않도록
언제나 기쁘게 반응해주던 그런 아이였다.
모둠활동에 소외되는 친구가 없도록
피구경기에서 공을 못 만져본 친구가 없도록 해주는 그런 아이였다.
방과후에 교실을 청소하는 나에게
깨끗한 교실을 만드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그런 아이였다.
그 아이는 나의 학창시절을 반성케하는 그런 아이였다.
내가 기억하는 그 때의 교실은
열린교실이 훑고간 빈자리를 학력신장이 메우던 시절이었다.
12살 아이들과 치뤄내는 중간기말고사였지만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1점이 예민했던 그 때,
A4 5장에 빼곡히 들어찬 항의를 받던 그 때,
시험문제 출제를 위하여 깜깜한 밤하늘을 보며 퇴근하던 그 때,
학원에서 아이들의 시험지를 돈으로 사던 그 때,
이 정도면 문항출제비를 받아야하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던 시절이었다.
그 아이는 그 시험에도 늘 최선을 다했다.
35명의 아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내가 내어준 프린트와 교과서로 공부를 하던 아이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손에 학원숙제를 들고서
시험점수에만 집착했다.
그 아이는 학교에서 치뤄지는 시험에서 늘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 아이는 스스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명학원을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원에서 치뤄진 테스트에 거론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각종 영재원에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룹과외 멤버에 속해있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보통 엄마와 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아이는 아이들 사이에서 소위 "공부 잘하는 아이" 대열에 끼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이야기해줘도
그 아이는 "제가요? 아니에요"하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봐도 저렇게 반짝이게 똑똑한 아이를
왜 친구들과 부모들은 몰라본다는건지.
다음 학년의 영재원 서류 제출을 앞두고
영재원 추천서를 요구하는 전화가 빗발치던 때에
나는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영재원은 자신과 먼 이야기라고 했다.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이야기해줘도
그 아이는 "제가요? 아니에요"하는 말을 반복했다.
나도 한때는 열정넘치는 교사였기에
전화기를 들었다.
어머니, 이 아이는 왜 영재원에 서류제출을 안하는 것입니까.
제가 영재원 추천서를 17장이나 쓰고 있는데,
우리반에서 딱 한 명을 추천하라고 하면 저는 이 아이를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학원을 다니지 않아 준비가 되지 않았다하더라도 괜찮습니다.
떨어지더라도 이 아이가 충분히 자격이 있는 똑똑한 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반응도 아이와 같았다.
"우리 아이가요? 아니에요."
나의 끈질긴 설득 끝에
겨우 영재원 원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나도 한때는 열정넘치는 교사였기에.
영재원 추천서를 17장 쓰는 거나 18장 쓰는 거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추천서 속의 이름들이 과연 정말 추천받을 만한가에 대한 의문은 품지 않았다.
불합격 통지서를 움켜진 학부모가
교실문을 열고 들어와 내 머리채를 움켜질까 걱정했다.
다만, 영재원에서는 담임교사의 작문실력을 평가하고자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고
까만 밤하늘과 함께 퇴근했다.
영재원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았던 그 아이는 영재원에 탈락했다.
그리고 그 아이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너무 고맙습니다.
우리 아이가 똑똑한 아이인줄 몰랐습니다.
눈물이 왈칵 났다.
"똑똑한 아이"임을 입증하는데 이렇게 많은 힘이 들어야 하나.
나는 이토록 신뢰가 없는 교사인가.
그러나 그 날의 내 눈물은 한심함에 대한 슬픔보다 이제 되었다는 안도감에 더 가까웠다.
다사다난했던 일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내 열정을 쏟기에는 요령이 부족하여 흘러넘친 열정에 기가 죽던 그 시절.
생각하면 지금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한 한 해다.
다음 해 졸업하는 그 아이는
졸업식이 끝나고 어머니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6학년 소속이 아니었던 나를 찾아온 그 아이와 어머니를 보고 동료교사들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잘 지내라는
고맙다는
통상적인 인사를 주고 받으며 졸업을 축하해주었다.
그로부터 몇년 후
나는 결혼을 하고 또 아이를 출산했다.
엄마가 되는 그 길은 참 어려웠다.
나는 극심한 산후우울증에 시달렸다.
한없이 꺼져가는 나를 어찌할 줄 모르던 그 때,
그 아이 어머니로부터 문자 한통이 왔다.
가끔 내가 생각난다고. 항상 고마운 마음이라고 했다.
그 문자 한통이 한없이 꺼져가는 나를 수면위로 떠오르게 했다.
또 그로부터 몇 년 후
네가 돌봄담당이니 네가 우리 아이를 책임지라는 전화를 받고 가슴을 치던 그 때
자는 아이를 깨웠다고 신고를 하겠다며 설쳐대는 학부모를 겨우 진정시킨 그 때
그 아이 어머니로부터 또 문자 한통이 왔다.
잘 지내시냐고. 우리 아이는 그 때부터 열심히 노력해서 의대에 진학했다고. 생각지도 않던 곳이 꿈이 되어 잘 지낸다고. 항상 잘 지내시라고. 늘 고맙다고.
전화기를 부여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어쩌면 그 어머니의 문자가 지금까지 나를 교직에 서 있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게
한때는 서툴지만 열정넘치는 그런 선생님이었다.
가끔 그 열정이 그리워지는 때도 있다.
그리고 종종 그 어머니의 감사함이 생각난다.
열정과 감사함으로 버티어왔던 내 교직은
이제 어디에 기대야 할까.
끝도 없이 쓸쓸해지는
가을의 끝자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