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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커피 Dec 15. 2022

급한 선생님의 느긋해지기

그래, 기다려 줄게.

저는 인내심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급하다고 해야할까요? 보내야할 공문이 있으면 마감 2~3일전에는 공문을 발송합니다. 계획서는 늘 학기의 시작과 동시에 제출할 수 있도록 미리 작성해두죠. 내일 수업할 때 써야할 활동지가 있다면 오늘 퇴근전에는 모두 복사해서 책상위에 있어야 마음이 편합니다. 이렇게 쓰고보니 어쩌면 저에게는  “급하다”는 말보다 “미리미리”가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학급을 경영하다보면 "미리미리" 되어 있지 않은 일들이 많습니다. 매일 같이 아침에 지각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수업 시작시간이 되었는데도 수업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기도 합니다. 수학문제를 풀라고 하면 연필도 잡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기도 하고, 알림장을 쓸 시간인데 알림장을 펼치지도 않습니다. 


해야할 일이 있는데 준비가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교사는 뭘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이들에게 반복해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한번 이야기해서 안되는 아이들에게는 두번, 두번 이야기해서 안되는 아이들에게는 세번, 세번 이야기해서 안되는 아이들에게는 네번….. 끝은 없었습니다. 횟수가 거듭될 수록 저의 말투와 표정은 점점 굳어져갔습니다. 저의 에너지도 많이 소모되었습니다. 수업준비를 하다가 수업시간이 많이 지연되기도 하였습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아이들”에 대한 고민은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되어 커다란 물음표로 남았습니다.


어느 해, 1학년을 맡게 되었을 때 저는 이 커다란 물음표가 너무 무거웠습니다. 그 때 동학년 선배님께서 해 주신 말씀에 저는 그 물음표에 대한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좀 자라게 놔 둬. 있다보면 잘 해. 너무 맘쓰지 말고. 한달만 있어봐. 조금 낫다? 그러고 한 학기가 지나봐. 얼마나 잘하게. 2학년 올려보낼 때 되면 다 잘해. 걱정안해도 돼. 아직 책 펴고 싶지 않은 거야.” 


처음에 저 말을 듣고는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두라니. 물먹고 자라는 나무도 아니고, 그냥 두라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저의 머릿속에 내내 맴돌았습니다. 그래서 한두번 반복해서 해야할 일을 이야기 해주다가 진짜 그냥 두었습니다. 수업시작한지 20분 정도 지나자 모든 아이들이 책을 펴고 연필을 쥐고 있었습니다. 제가 펴라, 잡아라, 수없이 이야기하면 20분정도 걸렸던 수업준비가 그냥 기다리니 20분정도 걸렸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뭔가 편하면서도 시원섭섭한 그런 느낌?


다음날, 그다음날도 기다렸습니다. 정말이지 선배님의 말씀처럼 시간이 줄어들더군요. 20분이 10분되고 10분이 5분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기다림의 시간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때로는 커다란 불덩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럴땐 차가운 물한잔을 머금으며 불덩이를 내려보냈습니다. 아이들의 행동변화를 보니 내 목구멍으로 올라오던 불덩이도 점점 그 크기가 작아졌습니다. 


내가 다그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뭘 해야 하는 시간이고, 나는 지금 뭘 해야 하는지. 그런데 아이들마다 그 알고 있는 것을 행동을 옮기는 것에 시간 차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은 그 시간 차이를 인정해주고 차이를 줄일 수 있도록 응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해, 아이들이 자란만큼 저도 자랐습니다.


그런데 또 다음 해 다른 아이들을 만난 지금. 오늘도 차가운 물 한잔을 마시면서 내일은 불덩이가 작아지기를 기도해봅니다. 올해가 지나면 또 조금은 성장해있을 나 자신에 대한 작은 기대도 함께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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