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한 오늘이라 감사해야 할까요
맥빠지는 하루입니다.
출근해서 하루를 마감하기까지 '오늘은 어떤 즐거운 일이 있을까?"하고 기대하는 마음보다 '오늘은 무사히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하는 긴장감이 팽배한 나날들이랍니다. 비단, 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아침을 시작하는 동료 교사들의 인사가 '좋은 하루 보내세요.'가 아닌 '오늘도 무사히'가 된 걸 보면.
저를 맥빠지게 하는 요인들이 너무너무 많지만, 딱 두가지만 들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나날이 일어나는 학폭사건에 다음은 우리반이지 않을까 하는 근심이 드리웁니다.
물론 학폭사건은 매뉴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매뉴얼대로 처리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 매뉴얼에 "교사의 마음"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건을 조사하는 것부터 아이들과 학부모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까지 모두 교사의 일입니다.
그 일을 처리하는 동안 학부모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폭언과 망언들을 교사에게 퍼붓습니다. 그리고 교사는 오롯이 그 말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합니다. 쏟아내는 것들이 말뿐이겠습니까. 말에 담긴 감정들은 고스란히 듣는 이의 마음 속에 들어찹니다. 교사가 경찰이 되어 사건을 조사하는 동안 교사의 마음이 생채기로 가득해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그런데 저를 더 맥빠지게 만드는 건 이런 학폭 사건에 대한 부담감 뿐만은 아닙니다. 학폭 사건을 대하는 관리자들의 메마른 시선이 더 힘듭니다. 학폭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담임의 "생활지도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와 관련된 각종 민원과 전화를 받아내는 일은 오롯이 담임이 해야하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세가 겨울의 싸늘한 공기와 닮아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교감, 교장선생님을 호칭하는 이 "관리자"라는 말이 과연 누구를 "관리"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교감, 교장이 "관리"하는 주된 대상은 교사입니다. 그렇다면 이 교감, 교장은 교사에게 일어나는 일을 보다 세심하게 살피고 책임져주어야 합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자기가 관리하는 교사에게 모든 일과 책임을 떠맡기는 것이 아니라 보다 주체적인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교사가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관리하는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닐까요? 지금의 행태를 보고 교감, 교장을 "관리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두번째, 저는 "학교만능설"에 부합하지 않는 좀 모자란 교사인가 하는 회의감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생활과 관련된 모든 일들이 학교의 책임으로 결부되면서 교사들의 커뮤니티에는 "학교만능설"이라는 조롱 섞인 농담이 오갑니다. 쓴 웃음을 자아내는 이 농담 속에는 교사들의 공감과 회의가 함께 녹아 있을 것입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에 모두 학교와 교사의 책임을 묻습니다. 교외체험학습을 신청하고 가족여행 중 자살한 사건에 대하여 왜 학교는 학생이 안전하게 교외학습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았는가 묻습니다. 이태원 압사사건에 대해서는 학교 안전 교육에 군중밀집과 관련된 교육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비난합니다.
저는 이 모든 것들을 "저(교사)"에게서 비롯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적인 시선은 그렇지 못합니다. 한장짜리 신청서가 두장이 되고, 이미 100페이지가 넘는 안전교육 계획서는 또 그 무게를 늘릴 것입니다.
얼마전 나의 주변인 A로부터 "학교만능설"을 떠올리게 하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A는 3학년 딸와 7살 아들을 양육하고 있습니다. 딸이 하교 후 동생과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다 아들이 K에게 배를 심하게 맞았다고 합니다. K는 딸과 같은 학교, 같은 학년(다른반)에 다니는 아이였다고 합니다. 딸의 담임에게 전화를 해서 이 사실을 알리고 학교에서 잘 주의를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저는 되물었습니다.
"딸아이 담임이 뭘 해줘야 할까?"
이 질문에 A는,
"그 학교 학생이 벌인 일이기 때문에 그 학교에서 책임을 져야지. 야단을 치던, 학부모를 부르던, 사과를 하던 학교에서 책임이 있는 거 아니야?"
저는 뒷목이 뻣뻣해짐을 느꼈습니다. 방과후에. 학교도 아닌 다른 곳에서. 우리 학교 학생도 아닌 아이들 때렸으면 학교의 책임인가요. 그리고 그 전화를 받은 건 K의 담임도 아닌 다른 반 담임입니다. 저는 그 담임이 해줄 일은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책임을 묻고 싶거든 그 부모에게 물어야 하며, 그 부모에게 묻는 법은 경찰에 신고하는 방법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경찰까지야 뭐, 그렇게까지..."
아,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작은 경찰서 정도로 생각하나 싶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 많은 민원 전화와 항의들이 그래서 벌어졌구나 싶었습니다. 어딘가에 항의하고 싶지만 경찰서에 신고 접수 하기에는 번거롭고 담벼락이 높은 느낌이 들어, 익명으로 전화해도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는 학교로 그 화살이 날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날 뻣뻣해진 목을 부여잡고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마음이 참으로 착잡했습니다. 날로 늘어가는 책임, 그 책임의 무게가 너무도 무겁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점점 더 무거워질 것이라는 예상은 아주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책임이란 권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사의 권위는 잃은지 오래인데 책임은 무한대로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 그날따라 더 무겁게 저를 짓눌렀습니다.
저는 우리반 학생들의 24시간을 책임지고 통제할 능력은 없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낸 것에 감사해야할 듯합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은 매년 더 커지는 듯 합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일에서 비롯된 긴장감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을 보다 엄격하게 통제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저의 학급 운영은 더욱 딱딱하고 건조해지고 있습니다.
교사와 아이들의 단단한 래포 속에 다정한 웃음이 오가야할 교실 대신, 수백번의 검열을 거친 감정없는 딱딱한 말들만 무성해 지고 있습니다. 전자보다 후자가 '무사한 오늘'을 보내는 데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래포형성에는 훨씬 불리하며 교감의 정도는 현저히 떨어집니다.
'무사한 오늘'을 보내기 위해 후자를 선택하는 교사의 발걸음이 처량하고 무거워 보이는 것은 단순히 저의 기운빠지는 기분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 아침 또 동료교사들과 나누는 인사는 '오늘도 무사히'가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