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여행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뜻밖의 사실'이나 예상치 못한 실패, 좌절, 엉뚱한 결과를 의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살마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 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집은 안식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족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을 다룬 소설들은 어김없이 그들이 오래 살아온 집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사람, 장소, 환대>의 관점"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nobody일 뿐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독자와 여행자 모두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그게 무엇인지는 당장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일상으로 복기할 때가 되어서야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여행의 이유에 대해서.
김영하 작가는 너무나 유명한 분이다. 대중에게 유명할 뿐 아니라 나에게도 유명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너무도 인상 깊게 보았을 뿐 아니라 <알쓸신잡>을 정말 재미있게 보았다. 거기서 보여준 방대한 지식과 관찰력과 멋진 입담에 매료되기도 했다.
김영하 작가가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꼭 한번 읽고 싶었다. 항상 읽고 싶은 책들의 리스트는 있지만, 그 리스트들이 너무 많은지라 그것을 읽게 되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조금 더 부지런히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다시 해본다.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새로운 곳에 대한 동경보다는 익숙한 곳에 대한 안락함을 선호한다. "우리나라 3대 맛집"보다 우리 동네의 "나만 가는 맛집"을 더 좋아한다.
여행을 즐기는 주변 사람들에게 "여행의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내게 돌아온 대답은,
재밌잖아. 좋아. 시간 나면 무조건 가는 거야.
여행은 당연히 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진 행위처럼 느껴졌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반응에 나도 덩달아 여행을 좋아해야 할 것만 같았다.
나는 "별로"라고 이야기하지 못했다. 나만 이상하고 유별난 사람으로 비치는 게 싫어서 여행을 좋아하는 척도 많이 하며 산 듯하다.
나에게 30대는 나를 알아가는 시기였다. 결혼, 출산, 육아로 점철된 생활 속에서 처음 알게 된 나의 취향을 발견하며 적잖게 놀랐다. 내가 이런 사람인 줄 30년이 되어서야 알게 되다니. 이렇게 나에게 무심했다니. 나의 취향에 대해서 알아가는 30대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이때 알았다. 나는 여행을 별로 즐기지 않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이때부터는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담담하고 심플한 나의 대답에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엄청 놀라거나, 여행을 설득(권)하거나.
그런데 코로나 시국과 함께 찾아온 개인주의 시대에서는 또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나도."
아마도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서였을까. 이상하게 최근 들어 <나는 여행을 별로 즐기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괜히 반갑고 눈길이 한번 더 가고 그런다. 아마도 이전에 느꼈던 아싸 집단으로서의 소외감을 보상받는 기분일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여행을 즐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행을 떠난다. 그러면서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때(연휴, 휴가철)가 되면 가야 할 거 같고, 아무리 집을 좋아하는 나지만 가끔 새로운 환경의 낯섦이 그립다는 정도.
그런 나에게 여행의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길게 대답해 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내 여행의 이유에 대해서.
김영하 작가가 이야기하는 여행의 이유에 크게 공감하기도 하고, 나는 어땠나 나를 돌아보기도 하고, 이런 이유로 여행을 하는구나 하며 새로운 시선도 느껴보았다.
일상에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통해서 '나'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일상을 새롭게, 그리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다른 외부적인 요소가 아닌 '나'라는 것도 새삼 느꼈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의 이유에서 출발하여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에 대해 집중할 수 있었고, 내 일상이 조금 더 즐거워졌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나'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꼭 이 책을 한번 읽어보길, 아니 꼭꼭 씹어먹어 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