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 엄마와 50대 딸의 역할 바꾸기
만 원의 행복. 여름 바지 두 장에 만 원이라니 어머, 이건 사야 돼! 여기저기 두루 입기 편한 검은 색에 바지 통이 넓고 주름지지 않는 재질이라 안 살 이유가 없었다. 에세이 워크숍에 가기 전에 들른 쇼핑의 성지 ‘고투몰’에서 이번에도 득템이었다.
한 장은 마침 귀국한 동생에게 주었는데 한동안 잘 입고 다녔다고 했다. 나도 티셔츠나 블라우스를 가리지 않고 잘 어울리는 이 바지를 교복처럼 입고 다녔다. 다만, 오천 원짜리의 한계랄까. 그간의 고투몰 쇼핑 경험으로 볼 때 첫 세탁에서 검은 염색물이 빠질 듯하여 단독으로 빨았던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입다 보니까 자꾸 바짓단에서 실이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세탁소에서 밑단을 만 원 주고 고치기는 뭔가 소비의 밸런스가 안 맞는 것 같아서 그냥저냥 너풀너풀 입고 다니고 있었다.
매일 누워만 계시던 상태에서 조금 호전되니 엄마는 하루를 마냥 길게 느끼시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엄마의 눈에 내 바짓단이 포착되었다. 쉽게 고칠 수 있는데 왜 그러고 다니냐고 하셨다. 바로 고쳐준다고 하시면서 이사할 때 작은 방 한구석에 밀쳐두었던 전동 재봉틀을 꺼내시는데 어쩐지 눈빛이 좀 더 또렷해지신듯 느껴졌다. 급하지 않으니 무리하지 마시고 천천히 하세요라고 말씀드리고 나왔다. 한 시간도 안 되어 카톡이 울렸다. 다 해놨으니 편할 때 가져가라. 바지 밑단은 내 기대보다 더 말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모처럼 딸을 위해 해 줄 일이 생긴 엄마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곧바로 바지를 입어보며 앞뒤로 돌아보는 내게 그러셨다. 엄마 아직 쓸모 있지? 자식에게 뭔가 해줄 게 있어서 행복하다고. 늙으신 엄마가 아무것도 해주시지 않아도 우리는 엄마를 사랑할 테지만 당신의 의식이 있고 움직일 기운이 있는 동안에는 엄마로서 자식을 돌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늙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일까.
집에 와서도 엄마가 말씀하신 ‘쓸모’가 계속 생각났다. 몇 년 뒤면 90세가 될 노인도 자신의 쓸모를 찾고 싶어 하다니, 사회적 동물로서 사람의 본능인가 싶었다. 영화 <차이나타운>의 대사 중에 “증명해봐. 네가 쓸모 있다는 증명.”이 떠올랐다. 그때도 쓸모라는 표현을 그릇이나 가전이 아닌 사람에게 붙이는 게 낯설고 무례하고 쓸쓸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났다. 생명에게 쓸모라니, 우리는 모두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배우지 않았던가.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가치’라든가 ‘역할’ 등으로 표현만 다르게 할 뿐 우리 모두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회사에 다녀본 사람은 아마 공감할 것이다. 평소 일이 많다고 불평을 해도 사실 할 일이 없는 상황이 되면 좌불안석은 물론 회사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있는 것 같아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걸 말이다. 야비한 정리해고 방식 중의 하나가 바로 이렇게 할 일을 주지 않아 조직원으로서의 ‘쓸모’에 사망선고를 하는 것이다.
시간은 많은데 해야 할 일이 없는 것도 고통이라고 한다. 오죽하면 노년의 ‘네 가지 고통’ 중에 무위고(無爲苦)가 있을까. 앞으로 엄마에게 작은 일들을 계속 부탁드리기로 했다. 바느질처럼 쉬운 일부터 시작해서 자식을 위해 뭔가 해주는 재미와 즐거움을 다시 찾으신다면 삶의 의욕도 더 올라가지 않을까. 엄마,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편히 쉬세요. 내 딴에는 이런 태도가 효도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엄마의 마음과 자존감을 헤아리지 못한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히려 50 넘은 딸도 아직 당신의 도움이나 조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엄마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군가를 돌볼 때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에너지가 생기는 법이다. 나 역시 대학생이 되어 자취방으로 독립한 아이가 엄마를 찾으며 도움을 원할 때 힘이 났으니까.
아, 동네 아파트 단지에 장이 서면 마늘을 한 접 사야겠다. 김장철이 되기 전에 아빠에게 마늘 까기를 부탁하려고 한다. 아마도 TV를 켜놓고 열심히 정리하시겠지. 원래 일을 시작하시면 마무리가 깔끔하신 분이니 곱게 다져 소분해서 냉동시켜 주실 것이다. 1년 내내 두고 먹으면서 감사 인사를 드리면 아빠도 자신의 ‘쓸모’를 상기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