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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주 Sep 09. 2023

저물어 갈 준비를 마치다

80대 엄마와 50대 딸의 역할 바꾸기

연명치료거부증 김ㅇㅇ. 예전에 시골 친정집에 간 김에 집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엄마의 화장대는 내 기준에선 늘 어수선하게 보였다. 로션 바구니 한편에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서 보낸 우편물이 있었다. CPR을 비롯한 일체의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셨다는 것이다.     


두 분은 평소 다니던 보건소를 통해 이 서약을 알게 되었다고 하신다. 심사숙고 끝에 당신들의 생을 인위적인 기계장치로 연장하지 않기로 하셨다고. 본인의 명료한 의지가 있을 때까지만 살고 싶다고 하셨다.      

자식으로서 이건 다소 놀라고 서운하기까지 하다고 말씀드렸다. 아빠는 다정하지만 확고한 어투로 말씀하셨다. 그렇게 생각할 건 아니야. 나는 의식 없이 기계 호스에 연결되어 살고 싶지 않은데 너희들 마음에 조금 위로가 된다는 이유로 시간만 늘리고 싶지 않구나. 엄마도 옆에서 거드셨다.      

“복지관 사람들이나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연명치료는 부모도 자식도 피차 못 할 노릇이야. 서로 힘만 들지. 어차피 가야 하는 게 인생이니 깔끔했으면 좋겠어.”     


두 분의 묘소 자리 역시 이미 마련되어 있다. 격포 선산에 가면 중시조 할아버지 묘소에서 직선으로 내려오는 위치에 있는데, 아빠가 장손이기 때문에 같은 항렬들 사이에서 정중앙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우아한 검은 돌 오석(烏石)에 엄마의 시 ‘동행’을 새겨 세우고, 그 앞에 두 분의 유골함을 넣을 수 있는 평장(平葬) 방식의 묘소이다.      


수의는 이미 25여 년 전 지방으로 낙향하신 후 준비하셨다. 엄마는 서울에서 환갑을 지나고 시골로 가셨는데, 건강할 때 인생의 마무리를 엄마 손으로 미리미리 준비해야겠다는 마음이 드셨다고 한다. 읍내 한복집에서 간소한 인견 재질의 수의를 마련하셨다. 분홍색 보자기로 싸인 상자에는 엄마의 수의가 담겨 있고, 황금색 보자기 속에는 아빠의 수의가 있다.      


영정 사진도 빼놓을 수 없다.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영정용 사진은 일찍 준비하는데 그래야 장수할 수 있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살아있는 사람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헛헛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말이지 싶다. 사진을 들여다보면, 현재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60대 부모님의 젊은 얼굴이 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손을 높게 뻗어 손자가 좋아하던 무화과를 따주던 아빠, 그리고 비상한 기억력으로 엄마의 엄마를 추억하던 모습이 그립다.     


부모님이 미리 준비하신 쉴 자리와 시비


예전부터 나는 부모님께서 하나씩 자신들의 죽음을 준비하고 자식들에게 알려주는 모습이 좋았다. 그 과정에서 그분들에게 슬픔이나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도 부모님은 죽음도 삶의 과정이라는 지론을 갖고 계셨고,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오빠와 동생도 비슷한 생각이다. 우리들은 선산에 가서 층층이 늘어선 산소들을 보면서 우스개 소리도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다른 거 말고 번호 6개만 찍어 주세요.  

반면, 남편은 죽음에 대한 대화 자체를 굉장히 불편해한다. 어쩌면 두려워하는 것 같아 보인다. 짐작하기론 어릴 때부터 시어머님이 당신의 지병을 내세워 지속적으로 고통과 외로움을 토로하고 관심을 갈구해왔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얼마나 더 살겠니 하는 류의 말씀으로 어린 자식의 마음 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준 것 같다. 결과적으론 80대 중반을 향해 잘 지내고 계신다.  

  

나는 죽음이 삶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장기기증 서약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2009년 김수환 추기경께서 돌아가셨을 당시 그분의 장기기증이 크게 부각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서약에 동참하기도 했다. 당시 이런 나의 심경을 남편에게도 전했으나 남편이 크게 반대하는 바람에 아직까지는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을 뿐이다. 당사자가 기증을 신청해도 사후에 가족이 명시적으로 반대를 하면 실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¹⁾ 나이가 들어가면서 서서히 남편을 설득하려고 한다. 내 몸이지만 남겨질 가족들의 마음도 돌아봐야 하니까 말이다.     

부모님께서 인생을 마무리할 준비는 모두 끝내셨으니 이젠 내가 에서 아름답게 보내드릴 방법을 알아보고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분을 보면서 느낀다. 인생은 시드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담담히 저물어 갈 뿐이다.


¹⁾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 제22조제3항제1호 단서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https://www.lst.go.kr/addt/medicalintent.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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