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승주 Sep 07. 2023

엄마는 복지관 탁구 여제

80대 엄마와 50대 딸의 역할 바꾸기

탁구공 400개. 박스를 열어보니 비닐봉지에 담긴 새 연습구 400개가 보인다. 탁구 문외한인 내겐 처음 보는 브랜드지만 탁구인들에겐 유명한 제품이라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400개가 넘는 탁구공들이 웬 말이란 말인가.     


내가 사는 지역으로 부모님께서 이사 오신 직후, 힘없이 누워 잠만 주무시는 엄마 대신 자잘한 짐 정리를 해야 했다. 커다란 비닐봉지 속에는 사용하던 탁구공과 부모님이 쓰시던 라켓 몇 개가 담겨 있었다. 어휴, 이게 다 뭐예요. 이제 이런 거 쓸모없으니까 처분할게요.

불과 몇 년 전에 이런 소리를 하면 아빠의 벼락같은 호통이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몸은 노쇠해졌고, 낯선 도시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무기력감 때문인지 아빠도 얼버무리듯 수긍하였다. 부모님에게 짠한 마음이 들었고, 또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것 때문에 짜증이 났다.    

 

지방으로 내려가신 후 부모님은 모처럼 자식들 뒷바라지에서 벗어나 두 분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함께 복지관을 다니시며 그라운드 골프며, 오카리나 등을 함께 배우며 무료한 시골살이의 시간을 메워 나갔다. 시골에서 엄마가 탁구를 치신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자수 병풍을 수놓아 시집을 온 사람, 파란 망토를 떠서 내게 입히던 사람, 자신의 원피스를 만들어 입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 번도 운동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그런 취향을 들은 기억도 없다. 그냥 아빠가 혼자서는 뭔가를 못 하니 엄마가 대동해서 노인들 탁구 모임에 참여하는 줄 알았다. 웬걸, 엄마는 70세가 넘어서 자신의 운동신경을 자랑하며 네트 앞에서 신명 나게 기합도 넣을 줄 알았던 것이다. 자식들은 엄마의 모습을 반의 반도 모르고 사는 것 같다. 어쩌면 가족이란 이름 때문에 더 알려고 하지 않아서일까?      


한때 노인복지관의 탁구 여제였던 엄마가 미처 쓰지 못한, 아마 앞으로도 쓰지 못할 새 탁구공을 당근마켓에 내놓았다. 빨리 정리하려고 턱없이 낮은 가격을 붙였더니 탁구장을 운영한다는 이웃이 모두 사 갔다. 짐이 빠져나간 자리가 개운하다.

하지만 88올림픽 때 공인 시합구라는 브랜드의 공 24개는 팔지 않고 우리집 창고 구석에 넣어두었다. 엄마가 힘차게 라켓을 휘두르던 그 시절을 잠시나마 더 기억하고 싶어서이다. 그 공을 매개로 엄마와 얘기를 하면서 잠시나마 활기가 도는 그 얼굴을 보고 싶다.     


날씨가 괜찮은 날이면 아침저녁으로 엄마를 모시고 아파트 단지를 잠시 걷는다. 10여 분 남짓한 시간밖에는 걷지 못하지만 그래도 엄마가 의지를 보여주셔서 너무도 다행이라 여긴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작은 그라운드 골프 경기장이 있는데 산책 중에 지나다가 회원들이 경기하는 모습을 한참 구경하신 적이 있다. 엄마도 시골 복지관에서 해본 적이 있기에 관심이 가는 것 같았다.   

  

엄마와 걷고 싶은 봄날의 산책로


내가 생각하는 엄마의 가장 큰 미덕은 긍정적인 마음가짐이다. 어떤 상황에 만나게 되었을 때 아빠는 대개의 경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엄마는 할 수 있다, 해보면 된다는 마인드이다. 기력이 없어서 오래 걷지 못하는 요즘도 엄마는 나에게 기분 좋은 말씀만 해주신다. 맞장구 치면서도 나는 사실 반신반의 하지만 엄마 말씀대로 되기를 소망한다. 엄마 말은 늘 옳으므로.

“조금 더 기운 나면 저기서 운동도 하고 그래야지. 단지 안에 원추리도 많고 능소화도 예쁘구나. 나무들도 커서 그늘도 좋고. 네 옆으로 이사 와서 좋다. 저쪽 산책로엔 벚꽃이 예쁘다고? 그럼 내년 봄에는 너랑 걸어봐야지. 꼭 그러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