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 엄마와 50대 딸의 역할 바꾸기
푸드코트 아니고 스낵코너. 이젠 모두가 푸드코트라고 부르지만, 80년대엔 스낵코너란 말이 있었다. 광장시장을 가보면 김밥이니 빈대떡을 파는 가게들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사방을 둘러싼 바에는 높은 의자가 놓여 있고, 바 안쪽에서는 1~2명의 아주머니들이 김밥을 말거나 라면을 끓여 내놓는 구조였다.
엄마의 스낵코너는 성북역¹⁾ 입구의 한 건물에 있었다고 한다. 이 역은 현재의 노원구에 위치해 있고, 2013년 광운대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은 지하철 1호선만 지나가지만 2010년까지도 경춘선 일반열차가 지나던 곳이다. 엄마는 옆 동네의 지인 소개로 가게 한 자리를 사서 장사에 뛰어들었다. 아빠가 위 수술을 받으면서 우리 다섯 가족을 상징하는 가게 ‘오성상회’를 접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누워 있는 아빠를 대신해서 엄마가 고군분투했지만, 가게에는 쌀이나 연탄, 술 같은 품목까지 있었기에 혼자서 감당하긴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회상하셨다.
하지만 정작 스낵코너는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두셨는데 들어보니 그 이유가 황당하다. 여느 날처럼 늦게 퇴근하고 집에 왔더니 그새 몸이 좀 회복된 아빠를 둘러싸고 동네 아저씨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더라고.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에 바로 스낵코너를 정리하셨다고 하니 겉으로 보이는 조용한 모습과는 다른 엄마의 강단이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에겐 매일 맛보던 김밥이 사라져서 아쉬웠던 기억만 남아있다.
“손님이 오면 ‘어서 오세요.’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그렇게 안 떨어지더라. 나는 그게 제일 힘들었어.”
자존심도 대단하고 자부심도 상당한 우리 엄마. 하지만 그 기질들은 상대방에게 발현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지켜내는 무기가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그 일대에서 존경받는 학자이자 지역 유지셨기 때문에 타인에게 머리를 숙이거나 부탁을 할 경우가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엄마에게는 스낵코너의 시간이 아마도 힘든 시기였으리라. 그래도 엄마로서 살아내야 했다.
엄마 기억으로 그 스낵코너를 팔 때 손해는 보지 않았다고 하셨다. 이제 급한 것은 새로운 생계 방안을 찾는 것이었다. 집을 팔고 이사를 가면서 악기 케이스를 만들어 납품하는 일에 연줄이 닿았다고 한다. 당시 주 거래처였던 악기상들은 낙원상가에 모여 있었는데, 엄마가 보니 장안동에서 버스를 타고 케이스를 납품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운전학원도 엄마가 직접 접수해서 아빠가 면허를 따도록 만들었다고 하시니,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밀어붙이는 엄마의 추진력은 지금의 나에겐 너무도 부러운 덕목이다.
엄마가 보기에 아빠는 어떤 일이 있을 때 뚫고 나가는 박력이나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엄마가 나서야 했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너무 엄격하게 기를 죽이면서 키웠던 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하신다고. 그래도 부잣집 장남으로 커온 것에 비해 서울살이에서 생활력 강하게 살아나간 점은 진정 존경스럽다고 덧붙이신다. 이복동생들을 셋이나 불러올려서 공부시킨 것도 그렇고,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연탄 배달을 혼자서 감당하며 가게를 유지하던 것도 모두 놀라웠다고. 그래서 아빠가 종종 부리던 주사 때문에 너무도 괴로웠지만 참고, 응원하고, 협조하며 살아갈 수 있었노라고 하신다. 이때는 고생스럽던 시절이라 기억하기 싫어서 별로 생각나는 게 없다는 엄마의 말이 짠하다. 그래도 드문드문 엄마의 지난 시간을 듣다 보면 여러 번 놀라게 된다. 여장부 스타일은 전혀 아닌데도 우리 가족이 흩어지지 않고 이렇게 올 수 있던 것은 엄마의 외유내강한 기질 덕분이라고 믿는다.
¹⁾ 역이 처음 생겼던 1963년 당시에는 성북구에 위치했기 때문에 성북역이라 명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