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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주 Sep 07. 2023

재주가 많으면 고생을 한다던데

80대 엄마와 50대 딸의 역할 바꾸기

기쁜 소식. 붓꽃의 꽃말이란다. 수년 전 엄마에게 받은 붓꽃 자수 액자가 있다. 엄마가 아가씨였던 시절에 손수 도안을 그리고 수를 놓았던 오래된 물건이다. 시골집에서도 내내 안방을 지키던 그 액자를 내게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붓꽃을 자주 바라보면 좋은 일이 생기니 집에 두고 많이 보라고 하셨다. 아마도 꽃말 때문에 생긴 믿음인가 싶은데 당시의 나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고 옷방에 세워두었다. 엄마, 나는 벽에 못 박는 거 싫어해 이러면서 말이다.     


엄마는 손끝이 야무진 여자였다. 1938년생인 엄마가 젊었을 시절에는 여자들에게 요리는 물론 자수, 뜨개질, 옷 만들기 등 많은 재능을 요구하던 시대였다. 의류산업이 다변화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구입 비용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말이다. 물론 모든 여자가 이런 분야에 재능과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엄마는 소싯적부터 손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의 하나가 8폭 자수 병풍이다. 엄마가 혼수로 만들어서 가져온 거라고 하시는데, 내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 보면 빈번하게 있었던 제삿날마다 상 뒤에 펼쳐진 모습이 생각난다. 검은 바탕 천에 사슴, 구름, 화병 등이 폭마다 수놓아져 있었다. 이 병풍은 30여 년이 지나 새롭게 큰 병풍을 장만할 때까지 소임을 다하다가 내가 결혼을 하고 대전으로 이주하면서 물려받게 되었다. 그래서, 아직도 간직하고 있느냐고? 한때 미니멀 라이프에 어설프게 빠져서는 베란다 창고에 있던 엄마의 병풍에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서 내다 버렸다. 사진이라도 찍어 두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고 죄송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아직도 엄마에게는 말씀드리지 못했다.  

   

그래도 엄마가 만들어 주신 고운 조각보들은 일상에서 잘 사용했었고 지금도 대바구니 속에 곱게 갈무리되어 있다. 엄마는 안 입는 한복들을 활용해서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조각보들로 재탄생시켰다. 테이블보처럼 크게 만든 것은 파리에서 한식 선생님으로 활동하는 막내딸에게 보내기도 하셨다. 당신의 솜씨가 딸의 강의에 화사한 장식이 된다는 사실에 꽤 위안을 받으시는 것 같았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 엄마가 만들어 준 옷들이다. 지금도 엄마 화장대 옆에 놓인 가족사진 속에서는 파란 망토를 입고 동생이 웃고 있다. 6학년 때 나는 긴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내리고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학교를 다녔다. 당시에도 집에서 뜨개질로 만든 목도리나 장갑 정도는 흔한 것이었지만, 이런 원피스는 흔치 않아서 꽤 주목을 받았다. 그래도 어린 마음엔 친구들이 사 입는 옷들을 더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아이를 낳은 후에는 손자를 위한 이불부터 풍차바지, 여름용 그물 조끼, 돌잔치에 입을 한복까지 만들어 주셨다. 너무 귀하고 의미가 있는 옷들이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이런 사랑이 전해져서일까? 아이는 외할머니에게 애틋한 정이 있다. 부쩍 쇠약해진 모습을 보고는 시키지 않아도 타지에서 안부 전화를 잊지 않는다.     

그런데 엄마는 언제부터 옷을 만들 줄 알았던 걸까?      

“결혼하기 전에 고향에서 잠깐 양재 학원 선생님으로 일했지. 그때 익한 패턴이나 기술을 잊지 않으려고 너희들 옷도 만들고, 내 외출용 옷들도 만들었던 거야. 예전에 네가 엄마 옷 중에 제일 마음에 든다고 했던 검은 꽃무늬 쉬폰 원피스 기억나니?”     

물론 기억한다. 초등학교 행사에서 V자 네크라인의 원피스를 입고 검은 수정 목걸이를 두른 엄마는 비슷비슷한 시장표 기성복을 입은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 세련되게 보였다. 돌이켜보면 엄마는 녹록지 않은 생활에서도 자신의 취향을 지켜가려고 애쓰셨던 것 같다. 가용할 수 있는 비용 안에서 하나를 사더라도 마음에 들고 눈에 차는 것으로 들여서 오래 지니는 그런 방식 말이다.      




한내에서 부용연립으로 이사 오면서부터는 엄마의 손재주가 우리 가족의 생계 그 자체가 되었다. 3층으로 된 연립은 반지하에 각 세대에게 할당된 창고 같은 공간이 있었는데, 어떤 집은 이곳에 세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부모님은 우리 집 소유의 공간에 공업용 재봉틀을 몇 대 놓고 악기 커버를 만들어 낙원동 악기상가에 납품하는 일을 시작하셨다. 그때부터 학년 초 가정환경 조사에서 부모님 직업란에 가내수공업이라 적어 냈었다. 부모님이 하시는 일이 회사원도 농업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직도 아니니 어정쩡한 기분으로 가장 비슷해 보이는 곳에 표시를 했던 것 같다.     


당시를 회상해 보면 재봉틀 모터 소리와 라디오 소리가 떠오른다.

겨울을 제외하고는 늘 문을 열고 작업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던 ‘나동’ 현관에 들어서면 그 소리가 제일 먼저 들렸다. 아직 초등학생이던 여동생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를 찾아 여섯 계단을 내려가 집 열쇠를 받아왔다. 그 계단을 거슬러 올라와 다시 세 계단을 올라가면 우리 집 102호가 나왔다.      

한참 뒤 성인이 된 후에 엄마에게 전해 들은 얘기가 있다. 어느 날은 여동생이 열쇠를 받아 올라가면서 엄마에게 투정을 부렸다고 한다. 나는 어두운 집에 혼자 들어가는 게 싫다고 하면서. 투정보다는 아이답게 서럽고 무서운 마음을 내비친 것이리라. 이제 우리 자매는 모두 중년의 단단한 마음을 가진 아줌마가 되었지만, 가끔 이 얘기를 떠올릴 때마다 열쇠를 들고 계단을 올랐을 어린 동생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리다.     


엄마의 야무진 솜씨 덕분에 우리 집은 다른 세대의 공간들까지 빌려서 공장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를 먹이고 가르치느라 너무 애를 쓴 탓일까? 지금은 오른손을 약간 떠신다. 증상을 완화시키는 약을 드시면서 지내시는 것 외엔 별다른 도리가 없는 상황이다. 손힘을 기르기 위해 색연필과 컬러링 북도 준비해 드렸다. 동네 상가에 있는 라탄 공예 강좌도 알아보았다. 엄마는 조금 더 기력이 생기면 해보겠노라며 나를 위로하고 안심시켜주신다.     


자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붓꽃 액자. 내게 작업실이 생기면 벽 중앙에 걸어 두고 싶다. 하루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다잡을 때도 보고, 행여나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도 보면서 희망을 갖고 싶다. 그리고, 엄마가 지금보다 더 회복되시리라는 기쁜 소식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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