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강의 남쪽. 이 단어를 듣고 단순히 강의 남쪽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강남’은 서울 어디쯤의 특정 지역이 자동으로 연상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의 북동쪽, 한내라고 불리는 동네에서 살았다. 사춘기 이후에는 조금 더 남쪽 지역으로 내지금은 하계동으로 편입된 지역 언저리이다. 사춘기 이후에는 조금 더 남쪽 지역으로 내려와서 장안동에서 살다가, 결혼과 함께 북서쪽인 개봉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한강 이북에서 좌우로 이동하며 강남과는 거리가 먼 서울살이를 마감하였다. 아주 예전에 엄마가 조금 더 욕심을 냈다면 우리 가족도 ‘강남사람’이 되었으려나?
‘한내’에 있던 내 기억 속의 첫 집은 마당이 있는 ㄱ자 집이다. 마루를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있었고, 대문 가까운 방에는 다른 가족이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셰퍼드와 치와와가 각 1마리씩 있었고, 고양이와 거북이, 이름 모를 금붕어들에 하얗게 맵시가 좋은 문조(文鳥)도 여러 마리였다. 그뿐이랴, 삼촌들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번갈아 우리집에서 살았으므로 늘 복작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마당 수돗가에는 폭 1미터, 길이 2미터쯤 되는 수영장이 있었다. 70년대에 진짜냐고? 진짜다. 부자였냐고? 아니다. 우리 가족이 살던 곳은 서울의 변두리였고, 집값이 매우 싼 동네였다.
아빠는 뚝딱뚝딱 뭔가를 잘 만들거나 고치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이를테면 맥가이버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되려나. 마당 한 켠을 파내고는 어쩌다 구하게 된 시멘트 몇 포대와 벽돌을 부어 네모난 욕조(?)를 만든 것이다. 내려가는 계단도 두어 개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친 시멘트 마감 때문에 가끔 등이나 다리가 쓸려 아프기도 했지만 여름철에는 친구들 사이에서 최고의 핫 플레이스였다. 몸집 작은 어린아이들이었기에 이 정도 크기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물놀이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첫 학기에 적응하고 있을 무렵 우리 동네에도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우리 가족도 이사를 가야 했다. 엄마는 수중에 있는 돈들을 모두 모아 다른 구에 있는 신축 연립빌라로 가기로 했다. 왜 하필 부용빌라였을까?
“뭔가 계획하고 그 동네로 간 건 아니야.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입주자 모집 광고를 본 거지. 수중에 있는 돈이랑 대출금을 모두 모아보니 갈 만하겠다는 계산도 서고, 너무 낯선 동네도 아니고 해서 가게 된 거야. 그때도 너희 아빠는 초반에 무턱대고 반대하더라. 동네를 벗어나는 게 겁이 났겠지. 그치만 웅크리고 있는다고 뭐가 바뀌겠니? 자식들 위해서 더 좋은 데로 나가봐야지.”
아빠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우리는 엄마의 결단력 덕분에 신축 빌라 1층에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 엄마, 조금 더 용기를 내서 한강을 건너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우리 삼남매도 ‘강남 스타일’이 세계를 휩쓸 때 좀 의기양양했으려나요?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찾아보니 신문기사에 1980년대 초 은마아파트는 서민, 중산층 아파트라고 소개되기도 하였다. 1979년 분양가가 102㎡에 1800만 원이었다고 하니 시간을 돌린다면 조금 더 남쪽 방향으로 내려가 강을 건너자고 엄마에게 강하게 어필했을 것이다. 지금은 상상도 하지 못할 가격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나는 어떻게 우리가 이사를 오게 되었는지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부모님께 물어본 적도 없다. 그저 대개의 아이들이 그렇듯 잠깐의 투정 뒤엔 낯선 동네에서 낯선 친구들을 만나며 적응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친구들과 멀리 떨어졌다는 아쉬움이나 낯선 아이들 속의 외로움은 마당을 가로질러 화장실을 가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에 빠르게 잊혀졌다. 비록 여름철 핫플이던 시멘트 수영장은 없지만, 이미 나도 마당에서 물놀이할 어린이가 아니었으므로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그 빌라에서 1982년부터 2000년까지 살았다. 자식들이 모두 출가하고 난 후 부모님은 그 빌라에 세를 놓고는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2021년 빌라 주변을 재건축하고 싶다는 부동산 디벨로퍼(그렇게 불렀다)에게 집을 팔면서 부모님의 서울살이는 완전히 막을 내린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엄마에겐 아파트의 평당 가격이니 재건축이니 하는 얘기는 그저 소란한 뉴스에 불과할 뿐이다. 그저 자식들이 커갈 둥지에 물이 샐까, 바람이 들까 걱정하는 마음 하나로 통장을 들여다보고, 용기를 내어 동네를 옮기고, 이삿짐을 싸고 풀었던 것이다. 인생의 황혼을 걸어가고 있는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엄마처럼 조용한 사람이 아빠에 맞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냐고 물었더니, 그때는 젊었으니까 라고 하신다. 자식이 있으니까 용기도 내는 거야라고 덧붙이면서.나는 자식을 위해 어떤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 둥지를 어떻게 살피며 지켜가야 할까. 엄마를 보며 답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