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다. 이불 담은 이케아 대형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육성으로 이런 말이 나왔다. 왼쪽 어깨가 쓰라려서 거울을 보니 손잡이 자국이 선명하네. 엄마의 세탁기는 아주 작은 5kg 용량이다. 여름용 패드까지는 세탁이 가능한데 봄가을 차렵이불은 용량이 안 맞아서 예전부터 가끔 내가 싸와서 다음 방문 때 갖다 드리곤 했다. 바꿔드린다고 해도 번번이 거절하시고는 이번 이삿짐에도 들고 오셨다.
이사가 결정되고 나서 남편이 한 말이 있다. 장인 장모님 모시는 일 때문에 우리들(이건 완화시킨 표현이고 실제로는 ‘자신의’ 일상이라고 했다)의 일상이 흔들릴까 걱정된다는 것이다. 당시엔 그 말이 무척 서운하고 노여웠다. 그래 역시 한 치 건너 두 치지. 나한테도 시가 부모님께 똑같은 효도를 바라지는 말아 줘. 그래서, 어버이날이나 생신 외에는 특별히 남편이 시간을 낼 필요가 없도록 배려했다. 부모님이 사위와의 저녁 식사를 넌지시 제안하실 때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어쩌면 내가 의도적으로 남편을 ‘우리’라는 범주에서 배제시킨 걸 수도 있다.
지금은 남편의 마음도 이해한다. 장남으로서 자신의 부모님을 가까이 모시지 못하는 아쉬움과 죄송함, 2시간 거리에서 5분 거리로 줄어든 처가 부모님에 대한 부담 등이 뒤섞인 상태에서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표현이라는 것을.
국이 식지 않을 거리에 모신지 고작 석 달이 지났다.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주변에서 우려 섞인 조언을 많이 해주셨는데 역시 이유가 있었다. 엄마가 편찮으신 특별한 상황이다 보니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되지 않았다. 6년째 해오던 자원봉사도, 의욕을 갖고 도전한 에세이 워크숍에도 온전히 마음을 쏟을 수 없었다. 못난 마음이 불쑥불쑥 얼굴에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