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바쁘냐? 엄마의 전화는 늘 이렇게 시작된다. 부모님은 몸도 편치 않고 이사 온 동네도 낯설기 때문에 아직까지 내가 동행하거나 해결해 드려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여권 만료기간이 다가온다고 안내문자가 왔단다. 흠, 촌각을 다투는 다급한 사안은 아니니 바로 찾아뵙지는 않고 전화로만 말씀드렸다. 그건 구청에 가서 갱신하시면 돼요. 다행히 구청은 집 가까이 걸어갈 만한 곳에 있고, 두 분도 위치를 아시니 가보시겠다고 하셨다. 아빠의 걸음걸이가 불안해서 내가 모시고 다녀올까 하다가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아직 낯선 동네지만 부모님의 일을 자신들이 직접 해결해 보시는 경험도 필요할 듯해서였다. 엄마를 국이 식지 않는 거리에 모신 지 6개월이 지났다. 요즘은 하루에 한 번 또는 이틀에 한 번 부모님의 용무를 봐드릴 수 있게 조절하고 있다. 잠깐 들러서 얘기만 하고 나올 때면 벌써 가느냐, 점심 먹고 가라 하시기도 하셨다. 하지만 내 일상이 흔들리지 않아야 오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대개의 경우는 사양하고 바로 부모님 댁을 나섰다. 이제는 엄마도 나의 생각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신다. 부모자식이라도 살림을 따로 하니 일정도 다르고 바쁜 일도 더 많지 않겠니, 네 생활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한 거야라고 말이다.
다음 날, 산책을 모시고 나가면서 여권 신청하러 가셨던 일을 여쭈어 보았다. 요즘 엄마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 같아서 내가 알고 있는 일도 일부러 더 물어보고, 세부 사항을 떠올리실 수 있도록 질문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기도 한다. 최근 사진도 필요하다던데 어떻게 하셨어요? 사진 찍는 곳은 잘 찾으셨어요? 아파트 상가 1층에 있는 사진 스튜디오에서 곱게 새 사진을 찍으시고(5년 전에 찍은 사진을 들고 가신다는 것을 말렸다.), 인화되는 동안 아빠의 발등 치료를 위해 2층 병원에도 다녀오셨다고 했다. 구청에 가니 시골과 달리 규모도 크고 첫 방문이라 낯설었는데 어느 중년 부인이 도와주어 여권 창구로 안내받으셨다고 했다. 말씀을 다 듣고 나니 사실 좀 힘드셨겠다 싶었다. 거의 2~3시간을 밖에서 보내고 집에 와서는 고단해서 두 분 모두 낮잠을 주무셨다고 했다. 그래도 엄마의 목소리에선 약간의 뿌듯함이 느껴졌다. 부축을 해줘야만 일어날 수 있던 6개월 전과 비교해 보면 엄마 혼자서 걸어 다니고 관공서를 다니며 일을 볼 수 있는 현재 모습이 스스로도 너무 대견하다고 하셨다. 내가 바라던 모습도 이런 거였다. 내가 손발이 되어 하나의 불편도 없이 밀착된 생활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부모님 두 분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자꾸 늘려가는 것 말이다. 한동안 나는 아빠와 충돌이 있었는데 그 원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사 온 후로 아빠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줄어드니 불안감이 커져서 그런 듯했다.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이나 책을 찾아다녔다. 노인이 되면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떨어지게 되는데 이 변화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과거의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정보 습득도 느리고 새로운 기기들은 어려우니 불안은 커지고 그것이 가까운 이들에게 짜증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편하게 가만히 계시라 하는 것이 효도가 아니라 일정 부분에 그분들의 도움을 요청하여 자기 효능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에 크게 깨달았다. 우리가 어릴 때 스스로 단추를 잠근다든가 운동화 끈을 맬 수 있게 되면서 뿌듯함을 느끼며 행복해졌던 것처럼 말이다.
노르망디에 있는 동생의 에어비앤비 농가 주택
며칠 뒤 카페에서 글을 정리하고 있을 때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새 여권을 찾아가라는 연락이 와서 아빠와 함께 구청에 가시는 길이라고 했다. 두 분은 이번에 5만 원씩 내고 유효기간이 10년인 여권으로 갱신하셨다. 사실 표현은 못 했지만 엄마가 여권을 갱신해야겠다고 하셨을 때, 그리고 10년짜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심 놀랐다. 아니, 장시간 비행기 탈 자신이 있으신 건가? 10년이라는 햇수는 다 채울 수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엄마가 혼자 힘들지 않도록 내가 사는 곳 가까이로 모셔왔고, 다리 근력을 키워야 한다며 자주 산책을 종용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엄마의 남은 시간을 자신하지 못했다. 아마 엄마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이사를 결심한 것도 엄마가 먼저 떠나면 혼자 남을 아빠가 자식들 돌봄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이런 내 마음을 읽으시기라도 하신 듯 10년짜리 여권으로 신청하신 이유를 말씀해 주셨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데 나이가 많다고, 지금 당장 아프다고 인생을 지레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니? 혹시 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겠지. 아아, 나는 정말 엄마의 이런 태도가 너무 좋다. 존경스럽다.
새 여권을 들고 엄마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은 어딜까? 아마도 막내딸이 사는 프랑스일 것이다. 15년 전, 엄마는 여동생을 보러 혼자 파리로 가셨다. 나는 아직 아이가 어렸기 때문에 동행을 해드리지 못했고, 아빠는 본인이 가는 것보다 차라리 그 비행기 값을 주는 것이 막내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겠냐며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셨다. 엄마가 동생에게 다녀오신 이후 하셨던 말씀이 기억난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어둡고 작은 방에서 가만히 앉아있던 모습에 마음이 시렸다고 하셨다. 당시 동생은 파리 12구에서 자그마한 아시안 마트를 운영했는데 가게에 딸린 작은 공간을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민을 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서 적응하고 뿌리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엄마는 동생의 초등학교 입학식 때 일화도 함께 들려주셨다.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한 반이 된 아이들이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줄을 맞춰 운동장에 앉아있었는데, 동생의 뒤에 있던 한 남자아이가 계속 동생에게 모래를 뿌리며 장난을 걸었다고. 몇 번을 참던 동생은 한계에 다다랐는지 벌떡 일어나 부츠를 신은 발로 그 남학생을 냅다 걷어차 버렸다는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동네 아주머니들은 잠시 조용해졌고 말이다. 네 동생이 그렇게 당찼다. 그러니 파리에서도 씩씩하게 잘 살 거야. 엄마의 말씀은 독립적이고 행동력 있던 막내딸의 기질을 믿으니까 나온 것이었지만, 아마 엄마 스스로도 그 말씀에 기대어 마음을 위로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까? 동생은 홀로서기로 힘들었던 시간를 이겨내고 지금은 파리에서 셰프로 활동하고 있다. 시골에 오래된 농가를 사서 자기 손으로 하나 하나 고치고 내부 단장을 완료했다. 주말 마다 파리에서 노르망디까지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내려가서 본채 옆에 수영장도 만들며 머나먼 타국에서도 든든하게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동생은 엄마를 많이 닮았다. 어떤 일 앞에서도 일단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상황에 맞선다. 어설픈 자기연민 따위는 없다. 동생이 한국에 다녀간 이후로 엄마는 노르망디 농가에 대해 대견해하고 궁금해 하셨다. 사진을 몇 장 보여드렸지만 직접 가서 보시는 것에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엄마의 진짜 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심 내가 과연 갈 수 있을까 확신을 못하실지언정 입 밖으로 말하실 분은 아니다.
새롭게 디자인된 청색 여권을 들고 오신 엄마의 손톱이 고운 다홍빛이었다. 엄마 혼자 나선 산책길에 봉숭아 한 그루가 보이길래 꽃잎을 몇 장 따오셨노라고 하셨다. 손톱물을 들이셨으니 이제 첫눈을 기다려 보겠다는 말씀에 내 마음이 행복했다. 엄마가 어찌 되실까 봐 말하지 못했던 불안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엄마의 방식으로 자식들을 지켜주고 계셨다. 거창한 말을 하시는 법이 없고, 공허한 약속을 하시지도 않는다. 그저 자식들 곁에 머무는 동안에 함께 행복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주신다. 한동안 유행하던 표현대로 하자면 엄마는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 가장 물려받고 싶은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