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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주 Oct 22. 2023

엄마는 카페에서 색칠 공부하는 할머니

80대 엄마와 50대 딸의 역할 바꾸기

요즘 엄마는 오른손을 다시 미세하게 떠신다. 몇 년 전 증세가 시작되었고 이를 완화시키고자 신경과 약을 계속 복용 중이었다. 이사 오신 직후엔 너무 기력이 없으시고 상호 작용도 어려운 지경이라 새로운 병원에서 다시 검진을 받게 되셨는데, 혈압이 매우 낮은 상태라 기존에 손 떨림 때문에 드시던 약을 조금 조절해야만 했다.  손 떨림을 완화시키기 위해 근육 이완제를 처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향으로 혈압이 낮아진다는 설명이었다. 우선은 혈압 문제가 시급하다니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약을 바꾸고 나서 두 달쯤 지난 이후부터 조금 앉아있을 힘이 생긴 엄마와 아파트 둘레길 산책을 시작했다. 처음엔 5분 정도 걷고 나서 길가 벤치에 앉아서 쉬어야 했다. 2주 정도 지나니 10분은 걸으실 수 있었다. 다소 힘든 경우도 있었는데 참는 것이 특기인 엄마는 어지간해서는 내색을 안 하시기 때문에 내가 안색을 잘 살펴서 중간중간 물을 드시거나 쉬게 해드려야 했다. 


사실, 엄마의 이사를 마음먹었을 때 내가 꿈꾸던 풍경이 있었다. 이사오 실 집의 거실은 좁지만 아침에 햇볕이 가득 들어와서 무척 아늑한 느낌을 주었는데, 여기에 엄마가 쓰실 큰 탁자를 사드리고 싶었다. 거기에서 엄마는 책을 읽고, 아빠도 신문을 보시고, 가끔 손자들이 내려오면 편하게 둘러앉아 밥을 먹는 일상을 연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거실에 소파와 TV를 두어야 한다는 두 분의 의견을 어찌할 수 없어서 '엄마의 책상'은 불발되었다. TV를 따로 방에 넣어두면 'TV 바라기'인 아빠만 동그마니 방에 '갇혀있을' 모습이 불쌍하다는 것이 엄마의 거부 이유였다.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 의견만 주장할 수는 없었고, 결국 새로 이사 온 집에서도 예전 집과 다를 것이 없었다. 거의 하루 종일 거실의 TV 소리가 온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고, 큰 방이나 작은 방 어디에도 엄마가 차분하게 정신을 집중할 공간은 없었다. 좁은 주방에 맞춰 벽에 붙여둔 2인용 식탁 위엔 온갖 약봉지와 주전자, 물컵 등이 상주하고 있어서 책을 펴기엔 정신이 사나웠다. 엄마, 자꾸 기억이 안 난다고만 하지 마시고 두뇌활동도 계속하셔야 해요. 책도 보시고 가계부도 쓸 수 있게 침대 옆에 아주 작은 탁자라도 사드릴까요? 


짐을 늘리고 싶지 않다는 엄마의 뜻에 따라 큰 탁자의 꿈은 접었다. 대신 엄마의 산책길에 새로운 변화를 주기로 했다. 그전에는 아파트 단지 담장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한 바퀴 도는 것이 우리의 코스였는데, 이제는 산책로를 반만 걷고 후문으로 빠져나가 작은 개인 카페로 간다. 엄마는 차가운 것을 못 드시니 주로 따뜻한 수제 유자차를 사드리고 나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식사를 하신 지 두 시간 정도 지났을 때 산책을 하게 되면 간혹 스콘 등을 곁들이곤 하는데, 원래 엄마는 세끼 식사 외엔 주전부리를 좋아하시지 않기 때문에 결국 아빠 간식으로 싸가곤 하신다. 집에 혼자 계시는 아빠를 위해 아메리카노 한 잔도 빼놓지 않으신다. 주문까지 하고 나면 카페 탁자 위에 엄마의 '공부거리'를 풀어놓는다. 이제부턴 여기가 엄마의 책상인 것이다. 


카페 나들이를 시작하기 전엔 예전처럼 다시 책을 읽으시라 권했었다. 최명희 작가님의 <혼불>을 아주 좋아하시는 엄마. 예전에 전권을 다 읽으시고 작은 방 책장에 소장하고 계셨는데, 이제는 집중해서 글을 읽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하셨다. 안타깝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컬러링 북은 어떨까? 손 근육을 단련시키는 것이 두뇌활동에도 좋다고 하니 적당한 방법으로 여겨졌다. 마침 우리 집엔 36색 색연필과 컬러링 북 세트가 있었다. 지난봄에 친구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났는데 그때 사온 화조도 컬러링 북도 새 책 상태로 있었다. 엄마 화장대 위에 올려두고 관심이 생기시길 기다려봤다. 색칠놀이는 어린아이들이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셨지만 엄마의 손 힘을 기르는데 좋다고 말씀드리니 가만히 밑그림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셨다. 자식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아시기 때문에 그 걱정을 덜어줄 수 있다면 아이들 놀이 같아 어색한 색칠하기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분이다. 우리 엄마는.


엄마가 컬러링 북을 앞에 두고 앉아 어떤 색연필이 더 잘 어울릴지 신중한 표정으로 집중하셨다. 가스레인지 앞에 선 엄마, 거래처 일감 앞에 선 엄마를 보던 때와는 또 기분이 생경하면서도 보기 좋았다. 내가 이렇게 가만히 엄마를 바라보고 있는 게 얼마만인지. 가족이니까, 엄마니까, 이제 나도 내 가족이 있으니까 하는 이유로 엄마의 얼굴을 무심하고 당연하게 흘려보냈던 것 같다. 탁자 건너편의 엄마는 매우 작고 메마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엄마가 외할머니랑 제일 닮은 것 같아요. 그렇지? 나이가 들수록 엄마 얼굴처럼 되더라, 거울 볼 때 깜짝 놀라는 때가 많아. 고명재 시인의 시 중에 <엄마가 잘 때 할머니가 비쳐서 좋다>라는 제목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나도 더 나이가 들어 거울을 보면 오늘의 엄마 얼굴이 나오겠구나. 


손 힘이 없어서 연하게 칠해진 엄마의 첫 작품


10월은 엄마의 생일이 있는 달이다. 노인을 모시고 천천히 산책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기도 하다. 엄마와 길을 걸으면서 깨끗하고 푸른 하늘에 감탄도 하고, 아파트 내 어느 감나무에 감이 더 풍성하게 달려 있는지 품평도 하였다. 엄마, 우리나라는 1년 중에 10월이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계절 같아요. 엄마 생신도 10월이니 엄마가 복이 많은 사람인 거죠. 어떤 집은 부모님이 아프니 형제들끼리 서로 미루거나 싸운다던데 우리들은 서로 고마워하고 도우려고 하니까 이것도 엄마가 복이 많아서 그렇네요. 엄마 마음이 행복해질 수 있는 주제를 골라서 두서없이 수다를 떨었다. 엄마의 어릴 적 얘기들도 물어보고 맞장구도 열심히 쳤다. 그 시절에 하얀 바지에 하얀 구두라니 큰 외삼촌도 정말 대단했네요 이러면서 말이다. 생각해 보면 엄마에겐 내가 힘들었던 얘기만 일방적으로 늘어놓았던 것 같다. 어릴 때는 친구와 다툰 얘기, 직장 다닐 때는 이상한 동료 얘기 그리고 결혼해서는 시가 얘기 등 주로 내 마음의 옹이를 해소하려고 엄마와 얘기를 했었다. 엄마니까 받아주는 게 당연하다고? 세상엔 그렇지 않은 엄마들도 많다는 걸 이젠 안다. 나의 엄마는 넓은 숲처럼 나의 보잘것없고 옹졸한 얘기도 다 품어주셨다. 나는 아직 그럴 숲이 못 되지만 엄마를 웃게 하는 작은 나무라도 될 수 있다면 푼수처럼 수다를 떨 것이다.


엄마가 완성한 그림은 아직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색이 연했다. 색연필을 내려놓는 엄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비쳤다. 엄마, 이건 기록으로 남겨야죠, 엄마의 첫 작품이니까요. 남매들 단톡방에 엄마가 색연필을 들고 집중하시는 사진을 올렸다. 멀리서 마음을 보태고 있는 그들이 잠시라도 조금 안심할 수 있기를 바랐다. 동생이 커피값은 자신이 팍팍 보내줄 테니 동네 구석구석 카페 구경도 시켜드리고 재미있게 다녀달라는 부탁을 했다. 든든했다. 부모님의 병간호 앞에서 가족들끼리 다툼과 불화를 겪는다는 얘기는 흔하게 듣고 보았다.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미리 마음을 얘기하고, 서로에게 솔직히 부탁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아빠와 의견이 맞지 않아서 화가 많이 나면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면 오빠가 아빠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문제 해결에 '직빵'이었다. 


조금 더 엄마 손에 힘이 돌아오면 아파트 상가에 있는 뜨개질 가게에 들러보기로 약속했다. 워낙 손재주가 있으신 분이라 코바늘을 잡기만 하면 유행하는 니트 손가방 정도는 뚝딱 만들어 주실 것이다. 앞으로 남은 엄마의 시간이 이렇게 잔잔하고 평온하기를 기도한다. 그리 되도록 지켜드릴 것이다. 엄마가 어린 우리들을 지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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