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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피디아 Nov 26. 2022

내 시간의 주인되기 연습

하프-파이어족 #3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

처음 가는 길 - 도종환


완전한 퇴사를 앞두고 두 주 개인 시간이 허락되었다. 날씨도 좋은 4월 말이었지만, 집 소파에 누워 TV를 보거나 잠을 자며, 그렇게 열흘의 시간을 보냈다. 말끔히 차려입고 나갈 곳도 없었고, 한껏 멋 내 여행 갈 기분도 아니었다.


늘어진 채 열흘을 보내다, 문득 시간을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잠깐의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회복을 향하지만, 오랜 기간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결국 퍼진 삶이 될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삶에서 내 시간은 올곧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회사 패턴에 따라 시간을 사용했다. 근무 시간에 맞춰 일어나고, 법정 근무시간이 지나면 적당한 때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고, 필요한 수면 시간을 맞추어 잠드는 패턴. 근무하는 동안의 시간 역시 일에 의해 정해졌다. 미리 예정된 회의와 미팅 시간을 따라 움직이고, 그 사이 빈 시간에는 개인 업무를 진행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회사에서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일을 위해 정해진 시간을 따라 움직였다.


완전 퇴사. 매일 정해진 시간 틀 속에서 움직이다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24시간이 주어졌다. 원하는 시간에 하고 싶은 활동을 하며, 선호하는 생활 패턴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회사 다니는 동안 휴가나 주말의 시간 보내기와는 달랐다.

평일 낮 집.



노트를 꺼내 들었다. 하고 싶은 일을 적어 내렸다. '돈'을 위해서가 아닌, '타인'을 위해서가 아닌, 온전히 나를 생각하며 하나하나 적어보았다. 지금은 돈을 위해서보다는 나와 가치(기여)를 위한 일을 해보자.


적은 리스트들을 다시 보았다. 지금의 우선순위에 따라 2차 정리를 했다. 그렇게 절반의 일은 훗날로 미루고, 올해 할 일의 목록을 정했다. 논문, 글쓰기, 골프, 자격증, 독서.


리스트를 만들고 나니 초등학교 방학 때면 어김없이 만들던 원형의 생활계획표가 떠올랐다. 알록달록 색연필로 칠해가며 그려보았다. 몇 번 수정을 거쳐 드디어 완성했다.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고, 시간 계획을 세우고, 색을 칠해가니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완성된 다음 날부터 시간표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내는 시간이 알차지니 마음도 안정되어 갔다. 시간을 허투루 썼을 때의 불안감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이후 시간 패턴의 변화가 필요하고, 하고 싶은 일의 우선순위가 바뀌면 생활계획표를 다시 그리며 내게 최적화시켜나갔다. 넉 달 동안 4번의 생활계획표를 그렸다.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고 직접 최적 생활 패턴을 찾는 노력을 하던 6개월이 지나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1. 생활 패턴의 큰 틀은 회사 다닐 때의 시간을 따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기상 시간도 회사 다닐 때에서 30분 안팎이었고, 일을 시작하는 시간도 업무 시작 시간과 엇비슷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쉬기로 한 시간도 퇴근 시간 즈음이던 7시 전후였다. 물론 취침 시간도 11시로 같았다. 살짝 놀랍고 무서웠다.


입사 전에는 올빼미형이라 새벽 2~3시에 잠들고 오전 10시나 11시에 일어나는 생활 패턴을 가졌는데, 20년의 직장 생활이 이 패턴을 바꾸었다. 낮보다 밤이 공부에 집중이 잘되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낮에 일하고 어두워지면 쉬는 게 더 익숙해졌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하는데, 20년이면 사람도 바뀌나 보다.


다시금 느꼈다. 알게 모르게 직장 생활에 적응해 있었구나.



2. 한 번 만든 생활계획표의 유효기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지키지 못한 날이 이어지면 일과 시간을 조정했는데, 이때 크게 바뀌는 때를 보니 계절이 바뀌는 시점이었다. 자연의 큰 변화에 따라 삶의 생활 패턴 역시 바뀌어야 했다.


5월 초에는 오전에 걷기 운동을 위해 집을 나섰다. 하지만, 6월 말이 되니 낮 야외 운동이 힘들어졌다. 아예 이른 아침이면 모를까, 9시가 넘어 2~3시간 걸으니 햇살도 따가워졌고 체력 소모가 많아져 운동 시간을 바꾸어야 했다. 한 여름은 실내 운동으로 바꾸고 몇 개월이 지나니, 다시 집 앞 탄천을 걷기 좋은 계절로 바뀌었다.


계절이 바뀌면 생활 패턴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걸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7월 초 더워져 운동을 빠지기 시작하자 어느새 8월에 있었고, 실내 운동을 한참 하다 보니 걷기 좋은 9월을 놓쳐버렸다.


지금까지 회사 생활 365일에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는 날이 많지 않았다. 따사로운 봄 햇살 속에 활짝 핀 벚꽃과 알록달록 물들어 가는 단풍은 잠시 스칠 뿐. 추워지면 두꺼운 옷을 껴입고, 햇살이 뜨거워지면 얇은 옷을 선택하는 정도가... 계절의 변화를 따르는 생활 방식이었다.


이제는 계절 변화에 맞춰 생활 패턴도 달리 가져가 보려 한다. 봄 되기 전 봄을 준비하고, 가을 되기 전 가을 생활 패턴을 미리 만들어두고, 겨울이 오면 길고 추운 밤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해 두기로 했다. 한 계절은 대략 100일, 100일을 단위로 생활 계획표를 수정하며 자연의 리듬에 맞춰 움직여보기로 했다.




완전 퇴사 즈음, 하루 24시간이 온전히 주어졌을 때 당황스럽고 혼란이 왔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바쁘게 보내야 할지 여유 있게 지내야 할지, 18시간 일을 할지 10시간만 할지... 허둥댔다. 그렇지만, 생활계획표를 만들고 그에 따라 지낸 지 6개월, 이제야 시간의 주인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조금씩 생활계획표 없이 하루를 보내는 데 익숙해졌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절댓값으로 동일한 양이 주어진다. 하지만 시간을 사용하고 느끼는 건 분명 상대적이다. 지난 20년, 고민 없이 쓰던 시간이었음에도, 6개월 걸려 나의 시간을 찾았고, 여전히 찾아가고 있다.


♧ Self-Question  
2-1) 돈이 목적이 아닌 정말 나를 위해 하고 싶은 일(활동)은 무엇인가?  
2-2) 그 일들을 잘 해내기 위해 시간을 어떻게 나누어 사용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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