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피디아 Dec 02. 2022

이제 소속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

하프-파이어족 #4


지금까지 소속감이 필요하다고 느낀 적은 따로 없었다. 어쩌면, 늘 학교에 소속되어 있었고, 졸업하며 회사에 소속되어 그것의 소중함(?)을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퇴사하니 하나둘 실감 나기 시작했다.


퇴사하고 만난 전 직장 동생들 몇몇은 돈보다도 이 소속감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 했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구분해, 하위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 단계 욕구를 추구한다고 했다. 5단계 욕구는 생리적 욕구 - 안전의 욕구 - 사회적 욕구 - 존경의 욕구 -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매슬로우(Maslow)의 욕구 단계 이론 (출처: https://m.blog.naver.com/lemontea230/50157873339)


여기서 중간 '사회적 욕구'는 소속과 애정의 욕구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욕구, 어느 한 곳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 친구들과 교제하고 싶은 욕구, 가족을 이루고 싶은 욕구 등을 말한다(네이버 지식백과).


소속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 시간들이 다가왔다.


첫 번째는 명함에서 왔다.

5월 초 강사로 있는 대학교 과에서 학과 교수들과 강사들의 석식 자리가 있었다. 퇴사하고 나흘째였다.

인사하며 건네주는 명함을 받았다. 조직의 로고가 그려져 있고, 직책에 컨택 정보가 포함된.


... 실감이 났다. 지금 내게는 명함이 없다는 것. 명함에 넣을 소속이 없어졌다는 게.


지금까지 일하면서 명함은 일을 위해 만나는 이들에게만 전했을 뿐, 회사 밖에서 사용한 적은 없었다.

그때 단골 멘트는 '아, 죄송해요. 제가 명함을 안 갖고 다녀서요.'였다.

하지만, 지금은 명함이 아예 없는, 것이었다.

있는 데 사용 안 하는 것과 없어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심정적으로 차이가 크게 났다.


테이블에 올려놓은 명함을 들여다보는데, 쓸쓸한 표정이 느껴졌다.


다음 명함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지 기대하는 것으로 당시의 적적함을 달랬다.



두 번째는 건강보험료 때문이다.

건강보험료는 월급날 자동으로 빠져나갔기에, 따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 얼마 내고 있는지 애써 기억해 두지 않았다.


5월에 날아온 고지서에 숨이 덜컥 막혔다.

당분간 수입 없이 몇 개월 보내야 하는데, 매월 수십 만원을 별도로 내야 하다니!!

자산이 있어도 그것으로 발생하는 수입이 없는데, 일로 버는 돈이 없는데도 매월 수십 만원의 보험료를 꼬박꼬박 내야 하다니... 억울했다.


자동으로 빠져나갈 때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직접 통장에서 돈을 내려니 왜 이리 손이 덜덜 떨리던지...


그동안 신경 쓰지 않았던 건강보험료, 얼마 남지 않은 잔고에서 거액을 내려니 덜컥 가슴이 답답해졌다.



세 번째는 지원서나 이력서를 넣을 때였다.

거의 모든 곳의 양식은 소속을 쓰라 한다. 몇 번 공란으로 내다가, 뭐라도 채우기 위해 개인사업자를 낼까 생각도 했다. 소속은 현재 내가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란 생각에 조금씩 위축되었다.


지금은 강사로 있는 학교를 기입하거나 전 직장을 기입한다.

그동안 경험한 좁은 식견으로 정규직만 소속으로 생각했는데, 강사도 소속이 된다는 걸 조금 늦게 알았다. 재직 증명서도 발급이 되었다.

그리고, 기업 구직이 아닌 경우 전 직장을 기입하는 것도 허용이 되었다. 전직이라는 표기를 넣어도 되었고.


소속이 없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와 스스로 위축되어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자신감을 갖고 담당자와 상의하니, 현 소속이 꼭 아니어도 되었고, 지원한 곳 대부분은 현 소속이 없어도 되었다.


세상은 나를 특별히 바닥으로 끌어내리려 하지 않는다. 다만, 홀로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네 번째는 새로운 누군가를 만났을 때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이름과 소속'으로 소개하는 게 일반적인 시작이다. 역시 또 내게 없구나를 느꼈다.


초기에는 웃으며 '지금은 백수예요' 인사했다. 모두 일하는 소속을 갖고 있는데 나만 없으니 그 공간이 낯설게 다가왔다.


한 번은 함께 한 지인이 나의 말을 수정해 주었다. '백수 아니고 프리랜서잖아'. 생각해보니 맞다. 조직에서 주어지는 일이 아닌, 스스로 일을 찾아 하려는 프리랜서. 아직은 길을 찾아가고 있지만...




퇴사를 준비하며 몇 개월 버틸 돈과 앞으로 대략 할 일은 준비해 두었는데, 마음의 준비는 소홀했던 것 같다. '소속'이 없다는 사실에 여기저기 부딪히며 느꼈던 소소한 상처들이 있었다. 6개월이 지난 지금은? 이제 그 상황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알아 융통성 있게 건너가고 있다.


세상의 많은 일은 받아들이기 나름, 마음먹기 나름이기도 하다.


잠시 소속이 없다는 사실에 주눅 들지 않기로 했다. 이 시간을 건너야 새 공간을 만나게 되니까. 방향을 틀려면 견디고 버텨야 하는 시간이 분명 존재한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곳, 조금 일찍 경험하는 것일 뿐. 내 인생의 길을 찾아가는 중, 힘겨워도 의미 있는 걸음이길 바라며, 나의 지금을 응원한다.






작가의 이전글 내 시간의 주인되기 연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