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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피디아 Jan 20. 2023

외할머니

중간세대에서 바라본


외할머니는 올해로.. 그러니까, 음... 범띠이시니까, 여든여섯이시다. 외할머니 연세를 따로 기억하지 못해, 매번 이렇게 한참을 계산해야만 알아내게 된다. 외할머니는 나와 손주들 열세 명 나이를 찰떡같이 기억해 주심에도.





어린 내게 외할머니는 무섭고 차가운 분이셨다. 여느 어른처럼 아이라 봐주는 거 없었고, 잘못하면 호되게 야단을 치셨다. 외삼촌 댁에 다 같이 모여 TV 볼 때도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중학생이던 나는 연예인 나오는 예능 프로를 고집했고, 외할머니는 다큐멘터리를 보자고 하셨다. 다른 가족들 모두 양보했지만 외할머니만은 아니셨다. 외할머니께는 손녀 특별 대접을 기대할 수 없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씩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는 듯한 말들을 쏟아내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커플 메이킹 프로인 '짝'을 볼 때면, '망할 x들, 남자가 말이 많으면 많아 싫다 하고, 말이 없으면 없어 싫다 하고, 저러니 안돼' 나를 보며 한마디 하셨는데, 왠지 나를 들킨 것만 같았다. 안 좋은 것들을 크게 보던 나를. 엄마와 아빠가 한창 싸울 때면, '니 아빠가 저러는데, 닌 누구랑 살 거냐?' 여지없이 돌직구를 던지셨다. 고향집에서 엄마가 우리가 먹고 싶다는 요리를 한참하고 있을 때면, '다 큰 기집애들이 늙은 엄마를 부려먹네. 앞으론 니들이 해 먹어'라고 한 마디 쏘아붙이셨다. 오랜 기간 외할머니는 어렵고 불편한 분이었다.



외가는 시골이다. 경북 의성군 ㅇㅇ면 ㅇㅇ리. 십 대 후반 혼인 이후 줄곳 그곳에 사셨으니 70년. 지금의 동네 모습이 삼사십 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앞집이 이사 나갔고, 윗집의 누가 돌아가셨고... 이 정도 변화가 다이다. 외가도 그대로이다. 여전히 아궁이와 물펌프가 있고,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한다. 외할머니는 이렇게 한 곳에서 변화가 크지 않은 삶을 살아오셨다.


초등학생 시절 방학의 절반은 이종사촌들과 외가에서 보냈다. 여름 방학에는 오래된 느티나무를 오르며 동네 아이들과 놀았고,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고 냇가를 돌아다녔다. 겨울 방학에는 외할아버지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주면 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순정 만화 얘기를 했고, 눈이 온 아침이면 마당에 나가 맨손으로 눈사람을 만들었다. 닭장에서 온기가 있는 계란을 꺼내 와 '톡톡' 깨 생 달걀의 고소함을 맛보기도 했다. 달력 뒷면에 그림을 그리며 놀아도 재미있었고, 망가지고 깨진 식기류를 주워 한 소꿉놀이도 신났다. 자연과 함께 고민 없이 보낸 시간들이었다. 기억 속 외할머니는 함께 놀아주지는 않으셨지만, 자주 우리가 노는 걸 한참 바라보기만 하셨다. 끼니를 챙겨 주고 마실을 나가 어둑해지면 돌아오시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외할머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좋아하게 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손녀 특혜를 주지 않았고 아픈 곳에 정곡으로 돌직구를 날리시는 모습에 정이 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가 외가에 가자고 하면, 한숨부터 쉬었다.



하. 지. 만..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요 근래는 외할머니 뵙는 게 삶 최대의 힐링이다. 속내 감추며 얘기할 필요 없어 편하고, 상대 의도 따위 고려하지 않아도 되고, 만남에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같은 시간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위안이 된다.

작년 가을, 고향집에서 이십 여 분 운전해 외할머니를 뵈러 갔다. 코로나를 핑계로 한참 만에 들렀는데, 공간에서 오는 따뜻함과 위로와 격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감정 표현이 풍부했더라면, 외할머니를 안고 한참 눈물을 쏟아냈을지도 모른다. 상상 속의 나는 그러고 있었다.



요즘은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의 외할머니가 아닌, 대한민국의 한 세대로서, 여성으로서의 삶은 어떠했나.

만약 외할머니가 우리 세대에 태어났다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외할머니는 먹고살기 힘든 시절을 보내며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셨다. 농사지으며 끼니 해결하고 자식 낳아 출가시키는 게 인생이라 생각하며 살아오셨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해 본인 삶의 영역인 가족들과 집을 잘 지키는 게 최우선이라 생각하셨다.


얼마 전 아빠가 'ㅇㅇ리 판사'가 외할머니 별명이라 했다. 외할머니가 젊었을 때부터 동네 어르신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너무나 잘 어울리는 별명이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상황을 논리적으로 판단해 결론을 내리는 것. 외할머니는 참 잘하실 것 같다. 만약 우리 세대에 태어나 기회를 가졌다면 충분히 직업인으로서 판사도 잘 해내셨을 것이다. 다소 반항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어린 시절에도 외할머니의 총명함에 놀랐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열세 명이나 되는 손주들 나이와 근황은 한 번도 틀린 적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아랫 세대인 증손주들도. 한 세대 아래 조카들 나이도 헷갈리는데, 두세 세대 아래 아이들의 나이와 학년을 모두 기억한다는 건 놀랍다. 자주 엄마와 나는 외할머니 연세를 계산해야 하는데.

또, TV에서 접한 젊은이들의 사고방식과 삶은 누구보다 선명하게 이해하셨다. 지금 나는 Z세대의 삶의 가치관과 취향이 헷갈리고, 중학생 조카들의 생활 방식과 태도가 낯설어 어리바리한데, 외할머니는 다른 세대 삶의 변화 속 핵심을 집어내 트렌드를 이해하셨다.


자주 이런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외할머니의 삶이 안타깝다. 만약 우리 세대에 태어나 기회를 충분히 가지셨다면 한 자리 차지하지 않으셨을까. 지금 세대를 사는 내게 능력이란 일을 통해 얻는 사회적 역할인데, 외할머니에게 일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순환하는 농사였다.




젊은이였을 때는, 우리 세대 가치관만이 옳다고 생각했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더 많이 벌고... 도시화와 현대화 속에서 사는 게 올바른 삶인 줄 알았다. 그것을 쫓았고 여전히 쫓고 있다.


윗 세대와 아래 세대가 보이는, 중간 세대가 되니 관점이 달라졌다. 외할머니와 나는 무엇이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각자가 속한 세대의 환경이 다르다는 걸.


지금까지는 내가 접한 세계와 익숙한 가치관으로 다른 세대를 바라보았는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각각의 시각에서 사람의 삶을 바라보고, 때론 이들을 연결해 보기도 하며, 사람의 인생에 대해 새로운 걸 알아가고 있다.


이것이 나이 듦에 따라오는 성숙과 담금이지 않을까. 젊은이의 생기는 없지만 삶에 대한 온화함과 풍성함을 이해하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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