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20 - 빈 시간

by 백홍시

책을 들었다 다시 놓는다. 펜을 잡았다 선 하나 못 그어보고 다시 놓는다. 노트북을 열어 본다. 글을 쓰려 하얀 창을 켰다 기역자 하나 못 써 보고 다시 접는다. 노래를 들으려 이어폰을 꼈지만 이내 다시 빼 버리고 만다. 이 모든 게 5분 안에 일어나고 또 반복된다. 요즘 나는 무엇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지금 쓰는 이 글도 대체 몇 번의 시도 끝에 쓰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요즘 내가 왜 이럴까. 나는 원래 ‘빈 시간 때우기’의 달인이었는데 말이다. 빈 시간에 혼자서 할 일이 많았다. 요리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영어 공부도 하고, 노래를 듣기도 했다. 그것 말고도 혼자 있으면 할 일이 어찌나 많았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뭘 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은 그것들 중 아무것도 하기 싫다. 집중이 정말 하나도 안 된다.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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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즘은 멍 때리기를 자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폰도 보지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1시간쯤 있기도 해 봤다. 정말 놀랍게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에 불안, 초조만 가득 찼다. 불안해서 유튜브를 보고 짧은 명상 같은 것도 해 봤다. 물론 집중이 하나도 안 됐다. 날씨가 지나치게 더운 탓일까. 하긴, 생각해 보면 작년 여름 이맘때쯤에도 무기력하기는 했다. 그래도 요즘처럼 멍하지는 않았다. 예전엔 빈 시간이 반가웠는데 요즘은 빈 시간이 생기면 너무 불편하다.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너무 불안하게 한다.(아차, 사실 할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집안일을 해야 한다.)

한때는 빈 시간이 거의 없이 생활했던 적도 있었다. 하루에 9시간에서 10시간을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혼자서 만든 마감을 하곤 했다. 돈 버는 마감도 하고 공모전 참가도 했다. 아니면 주 6일 동안 종일 일을 하고, 남은 하루에는 알차게 쉬기도 했다. 그땐 아무것도 안 해도 마음은 평온했다. 너무너무 피곤했지만 그래도 그땐 자존감을 지킬 수 있었다. 그래도 어딘가에 쓸모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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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생각해 보니 요즘은 마감이 없다. 들어오는 일도 거의 없고, 개인적으로 정기 연재하는 작품도 없으니. 그러다 보니 빈 시간도 많다. 마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떤 작품을? 이렇게 멍하니 텅 빈 상태로 무얼 그리고 써야 할까? 다시 ‘디어다이어리’를 그린다 하더라도 요즘은 정말 정말 그릴 것이 없다. 일기 만화 말고 다른 것을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것. 그게 뭘까. 선뜻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텐데. 분명히 쓸모 있는 것이 있을 텐데. 그게 무언지를 요즘은 정말 모르겠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모르겠다는 주저리를 글로 늘어놓는 것뿐이다. 이런 비슷한 주저리로 글을 몇 번째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아무것도 못 하니 또 불안한 하루가 간다. 한숨만 가득 찬 빈 시간들이 모여 하루가 된다. 사실 텅 빈 머릿속은 한 가지 고민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그놈의 쓸모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욕구가 가시질 않는다. 최근에 자주 듣는 노래의 한 소절이 마음에 와서 콕 박힌다.

내가 대체 뭐 하나 싶다.

생각한다고, 고민한다고 뭔가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대체 뭐 하나 싶다. 얼마 전에도 작작 좀 하자고 글 써 놓고선 오늘도 또 고민이다. 이런 종류의 고민은 이렇게 앉아서 ‘어떡하지?’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데. 엉덩이를 떼고 움직여야 비로소 해결되는 것이다. 아, 이제 정말 이런 주저리로 글을 쓰고 싶지 않다. 나도 어딘가 쓸모가 있겠지. 나는 곧 그걸 찾아낼 것이고. 그리고 이 글보다는 영양가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재밌고 공감 가는 만화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곧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런 글은 오늘로 정말 끝이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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